장자의 설검
스스로 기술을 일으키는
「설검」은 장자가 정사를 돌보지 않고 투검(鬪劍)만을 좋아하는 조왕(趙王)을 세 가지 검(三劍) 이야기로 설득시킨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소위 천자지검(天子之劍), 제후지검(諸侯之劍), 서인지검(庶人之劍)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주지(主旨)나 어투가 전국책(戰國策)의 그것과 비슷하다하여 전국말의 종횡가(縱橫家)가 지은 글이 섞여 들어온 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설검」이 장자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을지 모르나 검도를 수련하는 사람들에게는 보기 드물게 좋은 교본이 됩니다. 참고로 한 번 보겠습니다.
왕이 말했다. “그대는 무엇을 내게 가르치려고 왔는가?” “저는 대왕께서 칼싸움을 좋아하신다고 들었기에 검에 관해서 한 말씀 드릴까 합니다.”라고 장자가 대답했다. 왕이 말했다. “그대의 검은 몇 사람이나 상대할 수 있는가?” 장자가 말했다. “저의 검은 열 발짝에 한 사람을 죽이되 천리를 가도 저를 막을 자가 없습니다(十步一人 千里不留行).” 왕이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천하무적이로다!” 장자가 이어 말했다. “대저 칼싸움의 묘란 상대가 공격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두고 이(利)로 유인해서 상대보다 늦게 칼을 뽑으면서 상대보다 먼저 칼을 닿게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이치를 한 번 시범코자 합니다(夫爲劍者 示之以虛 開之以利 後之以發 先之以至 願得試之).” 왕이 말했다. “선생은 좀 쉬시오. 숙소에서 쉬며 연락을 기다려 주시오. 시합 준비가 되면 선생을 부르리라.” 왕의 명으로 장자와 상대할 검사를 뽑는 선발 시합이 거행되었는데 참혹하게도 이레 동안에 사상자가 육십 명이 넘을 지경이었다. 왕은 그 중 대여섯 명만 골라 궁전 아래 검을 받들고 늘어서게 했다. 그러고는 장자를 불러내서 말했다. “오늘은 저 검사들에게 한 수 가르쳐 주시오.” 장자가 말했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바입니다.” 왕이 말했다. “선생이 쓸 무기는 긴 것과 짧은 것 중 어느 것이오?” 장자가 대답했다. “저는 어느 것이든 모두 좋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세 가지 검이 있는데 왕께서 원하시는 대로 쓰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 삼검(三劍)에 대해서 설명을 드린 뒤에 시합을 하고 싶습니다.” 왕이 말했다. “그 삼검이란 게 무엇인지 듣고 싶소.” 장자가 말했다. “천자의 검, 제후의 검, 서인의 검입니다.” [『장자』 잡편, 「설검(說劍)」, 안동림 역주, 『莊子』() 및 조관희 역해 『莊子』() 참조]
장자는 왕이 ‘천자의 검’을 쓸 생각은 않고 고작 ‘서인의 검’에 빠져서 정사를 소홀히 하고 있다고 나무랍니다. 정치의 본분을 잊고 투검에만 몰두하는 왕은 왕의 자격이 없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왕은 그 이야기를 듣고 혼비백산(차려진 밥상의 주변을 맴돌 뿐 숟가락 들 생각도 못합니다), 검투사들을 다 내치고 비로소 군왕으로서의 처신을 바로잡는다는 내용입니다. 사실 이런 내용은 『장자』를 읽다 보면 어디서고 마주칠 수 있는 흔한 우화입니다. 다만, 이 대목에서 출현하는 <후지이발 선지이지(後之以發 先之以至)>라는 말이 검도 수행의 한 요점을 설파하고 있다는 게 대견(?)하다는 것이 검도계 일반의 평가입니다. 흔히 <후발선지(後發先至)>로 줄여서 말합니다만, 그 경지가 바로 검도의 한 극의(極意)라는 것은 어느 정도 검수를 수련한 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것만 되면 검도는 아주 즐거운 게임이 됩니다. 저에게는 <십보일인 천리불유행(十步一人 千里不留行)>도 재미있습니다. 일보(一步)가 일검(一劍)이라 했을 때 ‘십보일인’이라는 것은 적어도 열 수 안에는 한 사람을 잡아낸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기량을 말하는 방법으로 ‘십보’라는 기준을 제시했다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사실 고수를 만났을 때 열 수를 견디기 어려운 게 현실입니다. 이 부분 역시 글쓴이(혹은 원 발설자)의 전문가적인 식견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도 싶다는 겁니다. ‘후발선지’와 함께 주목할 수 있는 대목이라 여겨집니다.
혹시 위의 내용 중 '일부러 틈을 내어주고'라는 대목을 오해하실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다렸다가 공격하는 이를 ‘받아치는 것’이 <후발선지>라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후발선지>가 그런 ‘술수’의 경지는 아닙니다. 그런 외형적인 기술의 차원이 아니라 일종의 심안(心眼)의 획득과 관련된 어떤 경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쯤에서 작동되는, 이른바 ‘스스로 기술을 일으키는 어떤 힘’의 존재를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감(感)으로 친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고, ‘명경지수(明鏡止水)의 경지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백련자득(百鍊自得)하는 경지, 일기일경(一機一境)의 경지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사족 한 마디. 인생 일반에서도 <후발선지>가 처세(處世)의 극의(極意)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꼭 상대의 움직임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평생 하수를 면치 못합니다. 칼을 뽑는 자는 누구든 그 발심(發心)의 정지 순간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그 정지 순간을 읽히지 않는 이가 진정한 고수일 것입니다). 그 마음을 읽어내어 ‘늦지만 빠른’ 칼을 쓸 수 있어야만 인생살이에서 실수가 없게 됩니다. 거칠게 말해서 ‘당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검도판에서는 제법 그 경지를 엿보며 살아온 터였습니다만 인생판에서는 늘 그 경지를 몰라 속수무책으로 하수로만 살아온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는 시골무사의 신세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