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여로
책은 집에 없었다
책과 함께 살아온 지도 50년이 넘었습니다. 내가 먹은 음식은 내 몸을 이루고 내가 읽은 책은 내 정신을 이룬다고 여기며 살아온 세월입니다. 문득 언젠가 읽은 신문기사 한 토막이 떠오릅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자기 인생에서 책을 처음 만난 시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200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루마니아 출신 독일 작가 헤르타 뮐러(58)는 유년 시절의 독서 체험을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모님은 가난한 농부였고, 책은 집에 없었다”. 소를 키우던 아버지는 “소들은 제가 다 알아서 큰다. 책이 왜 필요하냐”고 말하는 이였다. 하지만 소녀 헤르타는 공허와 결핍을 느꼈고, “멈춰버린 채 고립되어 있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책을 처음 만난 것은 작가 나이 열다섯살 때,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막 대통령에 취임한 시점이었다. 그는 “독서는 내게 정치적 독재와 개인적 고립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고 털어놨다.(조선일보 이수웅 기자)
우리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책이 없었습니다. 저도 ‘저절로 크는 소’처럼 컸습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저는 초등학교 시절 내내 숙제 한 번 해 간 적이 없었습니다. 학교만 갔다 오면 책가방을 던져 놓고 나가 노는 일에만 매진했습니다. 다음날 손바닥 몇 대 맞으면 될 일로 노는 일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일로 담임선생님이 가정방문까지 오셨지만 오히려 어머니는 시침 뚝 떼고 “장사 일을 거들다보니 숙제 할 겨를이 없었다”고 제 편을 들었습니다. 6학년이 되고 숙제가 없어지자 나는 듯 기뻤습니다. 그렇게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습니다.
책을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한 반 친구 중에 아버지가 무협지를 한 벽 가득하게 소장하고 있었던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에게서 무협지를 빌려 읽었습니다. 반 아이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무협지 열독(熱讀)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 아이를 통해 공급되던 와룡생의 『무유지』, 『군협지』, 『사자후』 등등의 무협지는 제게 놀라운 신세계를 보여주었습니다. 기연출사, 온갖 세상의 인연들이 화려하게 펼쳐졌습니다. 승리면 승리, 성공이면 성공, 연애면 연애, 그렇게 신나고 아름답고 황홀한 세계를 그 전에는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래 위로 빽빽하게 인쇄된 그 두꺼운 책들을 하루에 한 권씩 밤새 읽었습니다. 친구들끼리 돌아가면서 읽었던 관계로 게으름을 피울 도리가 없었습니다. 부득불 그때 눈을 버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무협지 몇 백 권을 읽고 난 후 저의 독서 체험은 다시 잠복기로 들어갔습니다. 부득불 학교 공부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삶의 최전선에까지 내몰린 상황에서 더 이상 신나고 아름답고 황홀한 세계를 꿈꾸는 사치가 제게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공부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사정은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린 왕자, 이방인, 싯타르타, 성경, 육조단경, 도산 안창호 등과 같은 경전류 서적을 접하는 기회를 제외하고는 거의 책과 담을 쌓고 지냈습니다. 결과적으로 제 인생은 ‘책은 집에 없었다’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학을 다니면서는 전공 관계상 어쩔 수 없이 몇 권의 책을 읽어야 했습니다. 오래 전, 그때의 심정을 요약해서 적은 글이 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한참 동안이나, 나는 문학에 몸 바쳐서 평생을 살겠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의 생각으로는, 문학은 어디까지나 환상이었고, 내가 살아남아야 할 곳은 어디까지나 현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전공의 선택은 부차적인 것이었고 일차적인 것은, 위협받지 않는 현실, 졸업만 하면 취업이 보장되는 국립사범대학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대학은 수없는 비상탈출구, 무한한 욕망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횡행하는 곳이었고, 그만큼 좌절과 배신의 수많은 형틀이 언제고 나를 기다리는 곳이었다. 그 복마전의 한가운데서 이청준이 나를 불렀다. 그리고 그는 김승옥, 황석영, 최인훈, 김현, 김윤식 등을 소개했다. 그들은 스승의 자리에서, 때로는 뜬구름을 가리키는 도반의 자리에서, 내게 환상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김승옥은 일찍 내 곁을 떠났다. 최인훈도 떠났고, 황석영은 멀리, 김현은 아쉬움을 남긴 채 아주 가버렸다. 내 환상의 입구와 출구, 그 뫼비우스의 띠, 그 위안과 좌절의 복마전, 내 허무의 여로는 이제 짐이 무겁다. 언젠가 남은 이들도 내 곁을 떠날 것을 생각하면 짐 진 자의 고단함이, 그 운명이 두렵다.(『세계의 문학』 1992 여름)
지금 보면 엄살이 철철 넘쳐흐르는 글이지만, 그 당시는 꽤나 심각했던 모양입니다. 환상으로의 돌격을 앞둔 동키호테가 마치 출사표나 쓰고 있는 듯합니다. 글의 내용으로 보면 남은 ‘사부님’이 두어 분밖에 없다는 이야긴데, 한 분에게서는 당일 바로 그 지면에서 하산을 해버렸습니다. 그분의 신작을 리뷰하는 자리에서 60년대식 감수성으로 왜 90년대까지 버티느냐고 생트집을 잡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죄스러울 따름입니다. 결국 현재는 한 분만 남아 있는 셈입니다(그 분도 얼마 전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의 글도 지금은 거의 읽지 않고 있으니 결국은 제 젊은날의 스승들과는 모두 헤어진 셈입니다. 어쨌든 모두 책으로 만난 스승들이니까 책 안에서 만나고 책 안에서 헤어졌습니다. 그러나, 책 안에서의 이별이 못내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 이청준 선생님의 묘소를 찾았습니다. 존경과 감사의 염으로, 그 앞에서 찍은 사진으로 한동안 페이스북의 프로필 사진을 삼았습니다.
대학에 들어 비로소 문학을 접했지만, 그렇다고 그 시절에 책을 많이 읽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책은 집에 없었다’로 살았습니다. 소설을 쓰겠다고 작정은 했지만 정작 습작기 필독서인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은 제대로 한 권 읽은 적이 없었습니다. 외국 작가의 소설은 친구가 끼고 다니던 스탕달의 『적과 흑』을 빌려서 읽은 게 고작이었습니다. 국내소설은 이청준, 황석영에서 오정희, 조세희, 이문열, 김성동, 박기동 등으로 번지면서 아주 초보적인 수준의 문식력이 형성되는 정도였습니다. 차일피일 그렇게 시간을 끌다가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신춘문예에 출품을 했는데 대학 1년짜리 여학생에게 고배를 마셨습니다. 83년 정월이었습니다. 황순원, 전광용 선생이 심사평에다 ‘관념이 승하다’라고 지적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작품에 몇 군데 장면을 더 삽입하고 하루 저녁에 한 편씩 습작 두 편에 살을 보태서 두 편을 더 만들어 「오늘의 작가상」에 투고를 했습니다. 5월쯤인가, 심사위원 선생님들이 한 번 보자는 연락을 주셨습니다. 그때 심사위원이 유종호, 김우창 선생님이었습니다.
김우창 : “영향 받은 작가는?”
양선규 : “이청준 정도...”
김우창(유종호를 쳐다보며) : “이청준을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생각보다 많네.... 외국 작가는?”
양선규(순간 당황하는 표정을 지으며) : “별로... 번역도 제대로 된 게 없고 해서....”
그냥 읽은 게 없습니다, 하면 될 것을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고,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외국문학 하신 선생님 앞에서 번역에 탓을 돌리는 몽니를 부렸습니다. 그러자 심사위원 선생님들이 얼른 눈치를 채시고 말했습니다.
김우창(유종호를 쳐다보며) : “정말 그래, 이제 중역(重譯)된 것 말고 제대로 된 번역판이 나올 때가 되었지.”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내내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평소 실력이 튀어나온 거지 뭐, 생긴 대로 살면 되는 거야 등등, 온갖 못난 생각들이 지저분하게 피어올랐습니다. ‘못난 놈, 꽃이 지는구나’, 얼마 전에 읽은 하종오의 「매춘」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 입가를 맴돌았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상은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수모를 겪은 후에야, 비로소 독서 습관이 교정되었다는 걸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 뒤에도 ‘책은 집에 없었다’가 속 시원히 제 곁에서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도스토예프스키나 한 번 정독했을 뿐 그 이후에도 여전히 책을 멀리 하는 집안 내력은 끈질기게 고수되고 있습니다. 문학교사가 되어 살다보니 자의반 타의반 이런저런 책들이 집안의 벽면을 두루 가리고 있지만, 주인이고 객이고, 아버지고 아들이고, 애지중지 그것들을 읽는 이가 없으니 여전히 ‘책은 집에 없었다’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소설가가 되었을 때 가까이 지내던 이들이 모두 깜짝 놀랐던 것처럼, 언제 한 번, 그 옛날 밤을 새며 무협지를 읽어내던 열독(熱讀)의 신이 다시 한 번 강림하실 지도 모를 일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