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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Nov 09. 2019

낙타와 바늘귀

비유의 기능

낙타와 바늘귀

생경한 비유가 종종 전달의 효과를 극대화한다. 틀에 박힌 고정관념을 소리 나게 찢어놓는 글들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시인들은 낯선 비유를 찾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 비유의 대가라는 면에서 예수와 시인 이성복은 많이 닮았다. 어법이 비슷하다. 한 마디 한 마디가 핵심에 바로 닿는다. 생경한 비유로 과감하게 상식과 편견을 뒤집는다. 기존의 맥락에서 코드를 분리해서 전혀 새로운 맥락 안으로 집어넣는다. 그 과정을 살펴서 비유의 생성과정과 그 효과를 알고, 동시에 ‘제목을 이기는 글쓰기’가 어떤 것인지 실물적으로 확인해 보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예수가 한 말이다. 낙타가 사막 지역의 유용한 운송 수단이었고, 세례자 요한이 낙타 가죽으로 된 옷을 입었었다는 기록도 있으니 그때의 낙타는 가까이 있는 ‘큰놈’들의 대표로, 일종의 환유적 보조관념으로 발탁되었을 공산이 크다. 다만, 굳이 그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해야 할 만한 그 어떤 현실적 연결고리는 찾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이 대목이 기존의 맥락에서 코드를 분리해서 전혀 새로운 맥락 안으로 집어넣는 예가 된다. 이 비유가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그 비유가 번역 과정에서 ‘밧줄’을 ‘낙타’로 잘못 옮겨서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그 비유의 맥락이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밧줄>은 가능해도 <실/낙타>는 대치(代置)가 불가능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고대의 성서 번역자가 아람어(예수가 산상의 설교를 할 때 썼던 언어) gamta(밧줄)를 gamla(낙타)와 혼동하였기 때문이었다는 주장이다. 그쪽 말에는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 주장을 평가할 만한 그 어떤 수단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비유의 효과라는 측면에서는 나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낙타와 바늘귀’는 이미 비유의 소임과 방법, 그리고 효과를 천하 만방에 증명해 보인 ‘오래 기억되는’ 역사적 실재라는 것이다. “(가느다란 실이 아니라) 뱃사람들이 쓰는 굵은 동아줄을 바늘귀로 집어넣는 것보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일이 더 쉬운 일일 것이다”라고 하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드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생생하고 의미 전달의 효과가(호소력이) 큰 표현이라는 것이다. 성공한 비유를 두고 뒷담화를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언어의 속성을 몰라도 한참 모르고 하는 말이다. 언어는 처음부터 이성적이지 않았다.
예수는 누구도 연결시키지 못했던 낙타와 바늘귀를 연결시켰다. ‘움직이는 것 중 가장 큰 생물’과 ‘구멍(통로) 중에서 가장 작은 구멍(통로)’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 찾은 것들이었다. 제법 덩치가 있는 동물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바늘귀 앞에서 낙타와 동병상련할 것이다. 죄 많은 인생으로 천국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자들은 누구나 자신을 ‘낙타’로 인식한다. 꼭 부자가 아니라도 그렇다. 죄 없는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인간에게 천국의 문은 바늘귀처럼 좁다. 바늘귀는 ‘어려운 것’을 대표한다. 나이 들수록 바늘귀에 실을 꿰는 일이 어려워진다. 우리 인간이 처한 절실한 사정들에 딱 부합하는 비유가 아닐 수 없다. 아무도 연결하지 못했던 것들을 그렇게 연결해서 그동안 모르던 세계를 보게(느끼게) 만든다. 낙타 같은 내가 바늘귀 같은 난관(難關)을 통과하기 위해서 반드시 변화를 겪어야 하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보통 이런 식의 돌발적인 보조관념의 출현은 의식의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의식이 의식하지 못하는 어떤 순간에 자유롭게 연상되는 것이다. 말하는 이의 돈독한 진정성이 그렇게 계시와 같은 비유를 만들어 낸다. “부자가 천국에 드는 일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라는 말은 그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다. 그렇게 세계를 확장한다. 세계의 확장에 기여하지 못하는 비유는 오래 가지 못한다. 무엇이든 잔망스러워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켜야 하고, 멀쩡히 고운 비단을 확 찢어서 단말마의 비명 같은 소리가 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변하기 싫어하는 고정관념을 강제로 변하게 해야 한다. 논리적인 설명이나 순탄한 인과관계 안에서 이성에 호소하는 것에 그친다면 그것은 세계의 확장에 기여할 수가 없다.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비유가 될 수 없다. 적어도 인간을 인간답게 살아오도록 격려해온, 세계의 확장에 기여해 온, 그런 비유의 핏줄은 아니다. 비유가 비유답게 사용되고 있는 시 한편을 보면서 세계의 확장을 같이 느껴보도록 하자.

연애에 대하여

1
여자들이 내 집에 들어와 지붕을 뚫고
담 넘어간다 손이 없어 나는 붙잡지 못한다
벽마다 여자만한 구멍이 뚫려 있다
여자들이 내 방에 들어와 이불로 나를
덮어싼다 숨막혀 죽겠어! 이불 위에 올라가
여자들이 화투를 친다

숨막힌 채로 길 떠난다
길 가다 외로우면
딴생각 하는 길을 껴안는다

2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만났다
버리고 버림받았다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손잡고 입맞추고 여러 번 죽고 여러 번
태어났다
흐르는 물을 흐르게 하고 헌옷을
좀먹게 하는 기도, 완벽하고 무력한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숨쉬고 숨졌다

지금 내 숨가쁜 屍身을 밝히는 촛불들
愛人들, 지금도 불 밝은 몇몇의 술집

3
내 살아 있는 어느 날 어느 길 어느 골목에서
너를 만날지 모르고 만나도 내 눈길을 너는 피할 테지만
그날, 기울던 햇살, 감긴 눈, 긴 속눈썹, 벌어진 입술,
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 나는 듣는다 이성복 ,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 지성사, 1979.


이성복 시인의 「연애에 대하여」는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에 대한 오마쥬(Hommage), 또는 그것의 ‘이성복 버전’이라는 느낌을 준다. 시인이 비유를 얻는 방법은 진정성이라고 앞에서 말했다. 이성복의 시에는 남다른 진정성이 많이 발견된다. 이성복은 이상, 김수영, 황동규를 잇는 우리 시의 한 중요한 좌표이다. 오래 기억되어 마땅한 시인이다. 적어도 진정성에 관한 한 우리 세대 중에서는 누구도 그의 오른편에 설 수 없을 것이다.
「연애에 대하여」중에서는 1연이 가장 인상적이다. ‘여자만한 구멍’이 쑹쑹 뚫려있는 시인의 연심(戀心)이 직빵으로(시인의 어투를 흉내낸 것이다) 전달되어 온다. 남자라면 누구나 그런 구멍 몇 개씩은 다 갖고 산다. 모두 여자들이 낸 구멍들이다. 거기다가 여자들은 화투까지 친다. ‘나’는 여자들에게 눌린다. 자기를 깔아뭉개고 여자들은 화투를 친다. “여자는 다 속물이고 괴물이다.”라고 외치는 것 같다. 그러니까 ‘화투치는 여자’와 이 시의 3연에서 소개되는 시인의, 「즐거운 편지」 투의 ‘연심’은 그야말로 ‘낙타와 바늘귀’의 관계인 셈이다. 굳이 한 번 그 속내를 풀어 보자면, “남자를 깔고 앉아서 화투나 치는 여자들을 제 멋대로 천사처럼 상상하는 놈은 평생 연애에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아니면 그 사이에서, 천사와 괴물 사이에서, 매일 같이 악몽을 꾸는 것이 자신의 연심(戀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어쨌든 세상의 여자를 다 적으로 돌릴 수는 없는 일(어머니도 있고 첫사랑도 있으니), 본인이 덮어 쓰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불 밑에 깔린다. 마음에 여자만한 구멍이 쑹쑹 뚫린 자들에게 연애는 늘 고단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시는 왜 쓰는가? 연애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큰 선물이다. 시인은 그래서 말한다. “내 살아 있는 어느 날 어느 길 어느 골목에서” 언제고 다시 만나고 싶은 것이 연애라고.
<'글쓰기 인문학 10강, 기본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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