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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Nov 17. 2019

놀 때는 놀아야

카오스의 힘

놀 때는 놀아야


노는 일에 대해서 좀 관대해지자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놀던 품새가 있다, 잘 노는 놈이 공부도 잘 한다, 놀 때는 놀고 일할 때는 일한다, 놀멘(놀면서)놀멘 한다, 모두 ‘놀다(play)’와 연관된 말들입니다. 더 찾아보고 싶은데, 나이 들수록 머리 용량이 딸려서, 우선은 거기까지만 찾았습니다. 얼마 전에, 외국에 나가 있는 가까운 친구의 딸내미가 ‘평생을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라고 말한 것이 부모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노는 일과 돈 버는 일을 하나로 만들겠다는 거였습니다. 일하면서 스트레스 받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앞으로 돈을 얼마나 갖다 쓰려는지 모르겠다며 친구는 울상을 지었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 ‘놀멘놀멘’ 하는 것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잘 놉니다. 어느덧 하나의 ‘직업 문화’가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심각한 것들을 비웃으며, 그저 흔들리며, 우정 건들거리며, 그렇게 ‘노는’ 자들이 세상을 바꾸는 견인차 노릇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저도 학창 시절 걷는 폼이 건들거린다고 욕께나 먹은 사람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로 남정네들만 건들거렸는데, 요즘은 남녀 없이 건들거리는 것 같습니다. 그게 보기가 좋으면 이미 세상이 바뀐 거겠지요. 참고로 ‘놀이’의 사회사적 의의에 대해서 요약하고 있는 글을 소개합니다.  


......우리가 과거의 낡아빠지고 침몰하는 제도들에 대한 충성을 고집한다면, 우리는 분명 그 배와 함께 가라앉게 될 것이다. 한편 이 격동기를 상이한 문화 간의 문화적 친밀성이 증대되는 가운데 나타나는 자연적인 단계로 이해하게 된다면 어떤 순간에도 느껴보지 못했던 엄청난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생활 속에 새로이 침입해 들어오는 것들을, 멋있는 남자가 매혹적인 손짓을 할 때 십대 소녀들이 느끼는 두근거림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침공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옆에서 누군가 슬쩍 찌르고 있을 뿐이다.
위기에 처한 모든 사회에서 아이들은 언제나 가장 먼저 최악의 위협을 기본적인 놀이 형태로 통합해 낸다.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었을 때 아이들은 「빙빙 돌아가는 로지 Ring Around the Rosie」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거리를 메운 홍반의 사람들, 악취 위장용 ‘꽃다발’, 화장되는 시체 더미들을 의례화했다. ‘잿더미, 잿더미’라는 단순한 후렴구가 나오고 ‘우리 모두 쓰러지네’라는 솔직하고 직설적인 표현으로 노래는 끝난다. [더글러스 러시코프, 김성기․김수정 옮김, 『카오스의 아이들』(민음사, 1997) 중에서]


젊어서는 노는 것이 즐겁습니다. 놀이가 좋고 친구가 좋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누구나 노동과 놀이가 하나 되기를 원합니다. 친구가 없으면 내일이라도 지구가 멸망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좀 모자라는 사람이지요. 그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아이들이 둔하고 의존적인 아이들입니다. 우리 때는 그런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혼자서 책만 파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많이 달라졌더군요. 삶을 즐기려는 욕구가 아주 강해졌습니다. 형편도 많이 나아졌구요. 직업에서 삶의 쾌를 찾지 못하면 기계와 다를 바 없다고 여깁니다. 그런 관점에서 직장을 여러 번 옮기는 친구들도 흔합니다. 물론 현실이 그렇게 녹녹하지 않다는 걸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겉보기에 놀면서, 혹은 일을 즐기면서, 돈을 거저 버는 것 같아도 사실은 99%의 피와 땀이 그 뒤에 있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난관이 있다고 지레 포기해 버리면, 그래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없다면, 세상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습니다. 구태의연한 것들의 세상으로 그냥 남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라는 아이들의 바램을 좀더 격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그런 꿈을 버리면 세상은 더 이상 바뀌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삶’이라는 우리의 염원이 이 땅 위에 실현될 수 있는 날이 그만큼 멀어집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삶’ 자체가 나쁜 것은 절대 아닙니다. 할 수만 있으면 그런 삶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굳센 의지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일을 ‘놀이’로 만드는데 성공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세상은 결국 그 안에서 사는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일에서 삶의 보람을 찾는 것을 이제는 ‘직접적 관계’로 파악해야 합니다. 일 그 자체가 보람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를 매개로 한 ‘간접적 관계’ 속에서 일의 보람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그건 과거의 유물입니다. 이미 그런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놀이와 일이 하나가 되는 삶을 더 이상 경원시해서는 안 됩니다.


사족 한 마디. ‘노는 사람’이 하는 일이 놀입니다. 놀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연장이 무기가 되듯이, 무슨 일이든 즐기면 놀이가 됩니다. 일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무슨 일이든 갖고 놀면 놀이가 됩니다. 어떤 직업도, 대통령직도, ‘갖고 놀면’ 놀이가 됩니다. 그러면 즐거운 세상이 옵니다. 물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노는 사람’이 세상을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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