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두병
그 모든 낯선 시간들
로렌 아이슬리의 『그 모든 낯선 시간들』이 드디어 배달되었습니다. 매주 메일로 찾아오는 ‘문학집배원’이 전해준 그 책의 내용 일부가 제겐 큰 파열음을 일으켰습니다(그 당시 ‘문학집배원’은 작가 은희경이었습니다). 로렌 아이슬리가 그의 자서전에 적었다는, 어머니와 관련된 몇 마디 진술이 저에게는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자전적 소설인 「적두병」을 쓸 때도 그랬습니다. 그때도 ‘문학집배원’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때는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이 저를 마구 흔들었습니다. 가라앉아 있던 오래된 것들이 그 ‘흔들림’을 통해 의식의 수면(水面)으로 떠올랐습니다. 그러니까 그것들은 제임스 조이스가 말했던 에피퍼니(Epiphany)였습니다. 영감의 운반자였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각성이나 영감을 제게 실어날랐습니다. 그것들의 느낌은 전신적인 것이어서 생각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신에 퍼지는 전율감이라고 해야 될 것들이었습니다. 그것들이 주는 느낌을 통과하면서 제 몸은 급기야 낡고 딱딱한 각질을 벗어던지고 연하고 투명한 새로운 껍질을 얻는 기분이 됩니다. 혹시나 해서 도서관에 대출 신청을 했습니다. 지금 당장은 책이 없으나 곧 사서 넣어주겠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고마운 생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그게 두 달 전 일입니다. 그 책이 이제야 저의 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책장을 여는 순간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처럼 저에게도 '그 모든 낯선 시간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선뜻 책 안으로 들어갈 염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 책은 보통의 자서전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내 이야기는 유쾌하지 않다",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을 쓸 때의 말처럼 『그 모든 낯선 시간들』이라는 책도 결코 유쾌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 아니었습니다. 그 제목만큼이나 낯선 책이었습니다. 듣기로 로렌 아이슬리는 유명한 인류학자였고 그가 남긴 저서들은 모두 베스트셀러였다는데 베스트셀러 작가가 쓴 책이라고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을 만큼 퉁명스러운 어조로 일관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가 관찰하고 설명한 우주의 아름다움은 그의 그 상처로 물든 인생에 대한 반어적 진술이었는지도 몰랐습니다. 책으로 만난 그의 삶은 온통 상처와 추악한 것들의 집합체였습니다. 물론, 『그 모든 낯선 시간들』은 그의 자서전이었으므로 다른 저서들과는 조금 다르리라는 생각은 했었습니다. 당연히 채색되지 않는 그림들이 군데군데 끼여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의 상식은 그의 책 앞에서는 한갓 때 묻은 염주알에 배인 소리뿐인 주문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자서전은 세상의 모든 선입견을 충분하게 뒤집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를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아니 스스로에 대한 글쓰기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저는 그를, 「적두병」식 기호로 보자면, ‘콩쥐’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팥쥐’도 ‘상팥쥐’였습니다. 그는 상처 그 자체였던 자신의 삶을 다른 색으로 채색하기를 완고하게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끔찍하게, 폭력에 대해 말했습니다. 세계는 애초부터 폭력의 얼굴로 왔습니다. 가난, 소외, 상처, 질병, 구타, 그 모든 세상의 폭력이 우리를 키웁니다. 당신은 우리를 키운 폭력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시작부터 그는 그렇게 묻고 있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적두병」을 쓸 때 그렇게 자주 인용했던 대목, “아무것도 아니에요, 엄마. 아무것도 아니죠. 쉬세요.”라는 구절도 제가 생각하던 그런 심심한, 센치멘탈한, 문맥에서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상처뿐이었던 그의 평생을 걸고 내뱉었던 살아남은 자의 애달픈 세라나데 그 자체였습니다. 자신을 평생토록 따라다닌 폭력, 세계의 무정함에 대한 한 마디 절규였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엄마. 아무것도 아니죠. 쉬세요. 그동안 쉴 수 없으셨죠. 그게 어머니의 짐이셨어요. 하지만 이제, 주무세요. 곧 저도 함께할 거예요. 비록, 용서하세요. 여기는 아니지만요. 그러면 우리 둘 다 쉬지 못할 거예요. 저는 멀리 가서 몸을 누일게요. 때가 다가와요. 저는 돌아올 것 같지 않아요. 이젠 이해하시겠지요. 나는 10월 묘비석의 따스함을 어루만졌다.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 사실 하나를 알아채는 데 온 생애가 걸렸다.(로렌 아이슬리(김정환 역), 『그 모든 낯선 시간들』, 강, 2008. 39쪽.)
저는 이 대목을 나이 든 아들이 어렵게 살다 간 어머니를 연민의 감정을 담아 위로하는 따듯한 작별 인사로만 이해했습니다. 앞부분에서 잠언적인 어조로 생의 허무에 대해 쓰고 이어서, “그 모든 고통과, 그 모든 고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둘, 다, 생이 지나가면서 늘 남기는 부스러기일 뿐이었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었기에 더 그랬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저 성공한 아들이 불운했던 어머니에게 드리는 사모곡 정도로 받아들이고 싶었습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내 삶의 모든 고통의 근원이었던 어머니,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가졌으나 청력에 문제가 있었고 타인과의 사회적인 소통에 늘 어려움을 겪었던, 정신병력이 있는 가계 출신이며, 남편과의 불화로 가득찬 결혼생활에서 얻은 아들을 버려두고 떠난, 그래서 아들에게 늘 자신의 핏줄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안기던 어머니에 대한 시원하고 섭섭한 마지막 이별의 언사였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불화에 대한 마지막 용서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죽어서야, 모두 우주의 한 부스러기로 돌아가서야, 그렇게 화해할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까지 ‘멀리 가서 몸을 누이게’ 하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 언젠가 어디선가, 내 곁에서도 그런 어머니를 보지 않았던가? 문득 소름이 돋으며,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머니가 그림을 잘 그렸다는 것, 방바닥에 도화지를 놓고 밑그림 하나 없이 풍경화며 인물화를 슥슥 그려나가는 어머니의 자태가 너무 아름다웠다는 것(형의 담임선생님은 그런 어머니의 그림 솜씨를 자주 빌렸다), 아버지를 졸라 곧잘 극장 출입을 했다는 것, 그리고 맛있는 팥밥을 할 줄 알았다는 것(나는 아내가 팥밥을 할 줄 모르는 것을 보고 비로소 그것도 하나의 재능임을 알았다) 등으로 나는 어머니도 팥쥐였으리라 짐작한다. 한 마리 아름다운 어미 팥쥐. 나는 그녀의 작고 어린 새끼 팥쥐. 어머니는 본인도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넌 외탁이야. 형하곤 달라.” 어머니는 늘 그렇게 말했다. 그것이 얼마나 달콤한 유혹인지 콩쥐들은 모른다. 그건 팥쥐들끼리만 아는 것이다. 콩쥐들은 절대 모른다.
갑자기 혼선이 왔다. 콩쥐 고모님의 붕대 감은 손이 팥쥐 어머니 탓이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리가 걷잡을 수 없이 치고 올라온 것이다. 어머니는 끼니를 얻으러 온 동갑의 시누이에게 팥도 아니고 멥쌀도 아니고 보리쌀 한 됫박을 내 주었다. 콩쥐는 그것을 치대고 치대어서 하얀 쌀밥으로 만들었다. 자신의 손을 버려서 식구들의 따스하고 부드러운 한 끼 밥상을 얻은 것이다.
“여우같은 년, 오빠가 불쌍하지.”
그날따라 고모님은 나에게 쓸데없는 역정을 냈다. 조막만한 발바닥에 무슨 묻을 것이 있다고, 아장거리며 고모집을 찾은 어린 친정 조카의 발바닥을 세숫대야 안에서 아프게 문질러댔다. 팥쥐 어머니, 콩쥐 고모님. 한 분은 일찍 가셨고 한 분은 여태 계신다. 옛날이야기는 언제나 살아있는 자들의 몫이다. 죽은 자들에게는 귀가 없다. 팥쥐 아들은 그게 슬프다.(졸작 「적두병」중에서)
또 하나, 저에게 전율감을 선사한 것이 있었습니다. 형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에게도 형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몇 시간째 혼수상태를 겪다가 형이 왔다는 소리에 눈을 뜨는 장면을 꼼꼼하게,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기록합니다. 그의 상처의 근원이 어디에 닿아있는지를 기록합니다. 저는 거기서 또 한 마리의 버림받은 팥쥐를 봅니다.
.....마지막 날이었다. 나는 방구석에 서서 그가 죽는 것을 지켜보았다. 네 시간 동안 의식의 징후가 보이지 않았다. 간병인이 나섰다. 그녀가 그의 귀에 대고 소리쳤다. “당신 아들 레오가 여기 있어요. 레오가 왔어요. 레오가 여기 있다고요.” 레오는 내 배다른 형제, 나보다 열네 살 많은, 전 결혼에서 낳은 자식이다. 레오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나는 두 번째 결혼을 하고 나서 한참 후에 태어났다.
느리게, 정말 한정 없이 나를 놀라게 하며, 죽어가는 사람의 두 눈이, 여러 시간 동안 내게는 무심하던 그 두 눈이, 열렸다. 둘 사이 서로 알아본 순간이 있었고, 나는 배제되었다. 아버지는 그 만남을 위해 아주 무한 거리를 되돌아온 것이었다. 말 없는 만남이었다.[로렌 아이슬리(김정환 역), 『그 모든 낯선 시간들』, 강, 2008. 27쪽]
로렌 아이슬리는 자서전의 뒷부분에서 스스로 늘 자신을 ‘바꿔친 요정아이’라고 자위하며 살았다고 진술합니다. 제가 ‘팥쥐’라고 부르던 그 아이입니다. 너무 낯익은 이야기였습니다. 우리 식대로라면 그도 팥쥐였다는 것입니다. 팥쥐는 콩쥐 가족들에게는 늘 거추장스럽고 성가신 잉여물이었습니다. 그 잉여물에게는 어머니의 사랑만이, 외탁이라는 말뿐인 보상만이 주어질 뿐입니다. 어머니가 팥쥐에게 보여준 짧은 사랑은 그런 잉여에 대한 눈가림의 위로였을 뿐입니다. 콩쥐였던 형의 빛나는 승리는 이미 예정된 것이어서 한갓 눈가림으로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팥쥐를 속이고 자축의 행사를 벌입니다. 어머니는 세상을 뜨기 전 몇 달 간은 아예 팥쥐 아들과의 상종을 피했습니다. 곁에 있던 팥쥐를 두고 멀리 있던 콩쥐만 찾았습니다. 저는 그렇게 시종여일 저의 팥쥐 신세에 대해서 썼습니다. 수준 낮은 투정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그런 식의 투정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한 치의 가감도 없이 그동안 자신이 몸담고 살아온 자신의 우주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로부터 버림받고, 노동과 질병에 시달리며, 아버지에게는 형처럼 아들로 인정받지 못하고, 세계의 폭력 한가운데로 던져진 자신의 삶을 ‘우주의 별처럼’ 그려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