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포터
머글
『해리 포터』의 서두 부분에 재미있는 대목이 나온다. 작가가 텍스트 외적 맥락을 텍스트 안에다 슬쩍 이식(移植)해 놓은 부분이 있다.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서 텍스트 안팎을 넘나드는 중의적 표현, 일종의 이중적 발화를 꾀하고 있는 것이다. 텍스트 내적 의미가 텍스트 외적 맥락에서도 의미화될 수 있도록 일종의 기교를 부린 부분이다. 기교를 부린 건 맞는데, 자신의 약점을 가리기 위해 부린 것이 아닌지라 장졸우교라고는 할 수 없겠고, 작가적 오기(傲氣)를 그렇게 내비친 것이라고 봤을 때 ‘장오우교(藏傲于巧)’ 쯤 되겠다.
정해진 출판의 기약도 없이, 비 맞은 초상집 개처럼, 여기저기 출판사를 찾아다닌다는 것은 작가로서는 굴욕적인, 참을 수 없는 자존감의 추락을 겪는 일이다(겪어보지 않은 자는 모른다).『해리 포터』의 저자도 만만찮게 그런 굴욕을 겪어야 했다. “이런 구닥다리 동화를 누가 읽겠는가?”라고 편집자들은 그녀의 낡은 재능을 무시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동심을 노리고, 코흘리개 돈을 노리고, 부모된 자들의 무식과 불신과 공연한 희망을 만족시켜야 하는 동화 편집자들은 누구보다도 영악하지 않을 수 없다. 동화로 돈을 번다고 마냥 동심의 세계를 동경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편집자들의 일차적 소명은 속지 않는 것이다. 무턱대고 돈의 유혹에 속아서도 안 되고(돈은 자기를 믿으면 달아난다), 어중이떠중이 작가에게 속아서도 안 되고(작가들은 다 미친놈이다. 오래 그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병이 옮는다), 자신에게 속아서도 안 된다(갑자기 무엇에 홀리는 수가 있다). 그들에게 잘못은 없었다.(이상은 내 뜻이 아님, 조앤 K 롤링의 빙의임. 그녀가 초상집 개처럼 출판사를 찾아다녔다는 것도 과장임. 사실은 에이전트를 통해서 12군데의 대형출판사에 출판 의뢰를 했다가 거절되었다고 함)
“난 해리를 그의 이모와 이모부에게 데려다 주려고 온 거라오. 이제 해리에겐 친척이라곤 그들뿐이잖소.”
“설마…… 설마 여기 살고 있는 저 사람들을 말씀하시는 건 아니겠죠?” 맥고나걸 교수가 벌떡 일어나 손가락으로 4번지를 가리키며 큰 소리로 말했다. “덤블도어, 그럴 순 없어요. 전 저들을 온종일 지켜보고 있었어요. 그 두 사람은 우리와는 전혀 달라요. 그리고 그들에겐 아주 못된 아들이 있다구요. 전 그 애가 저 길을 걸어가는 내내 사탕을 사달라고 소리소리 지르며 엄마를 발로 차는 걸 보았어요. 해리 포터가 이런 곳에 와서 살다니요!”
“하지만 해리에겐 여기만큼 좋은 곳이 없어요.” 덤블도어가 단호하게 말했다. “해리의 이모와 이모부는 해리가 크면 모든 걸 설명해 줄 수 있을 거요. 내가 그들에게 줄 편지 한 통을 써 두었어요.”
“편지 한 통이라구요?” 맥고나걸 교수가 다시 담 위에 앉으면서, 힘없이 말했다. “덤블도어 교수님은 정말로 이 모든 걸 편지 한 통으로 다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이 사람들은 해리를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그 애는 유명해질 거예요. 전설이 되겠죠. 전 오늘이 장래에 ‘해리 포터의 날’로 알려진다 해도 놀라지 않을 거예요. 해리에 대해 쓰여 진 책들도 나올 거예요. 우리의 세계에서 해리의 이름을 모르는 아이는 하나도 없을 거예요!”
“바로 그거요.” 덤블도어가 반달 모양의 안경 너머로 아주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아이라도 우쭐대게 될 거요. 걷고 말하기도 전에 유명해졌으니 말이오! 자신은 기억나지도 않는 일로 유명해졌으니 말이오! 그러니 그 애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될 때까지 그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서 자라는 게 차라리 훨씬 더 낫다고 생각지 않소?” (밑줄 인용자)
또 하나, 그들은 ‘머글’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몰랐다. 그 후줄그레한 물색의 30대 이혼녀가 자신의 잡동사니 오래된 이야기들 속에 ‘머글’이라는 단어 하나를 슬쩍 끼워놓은 것을 그들은 보지 못했다. 그것으로 인해 조만간에 세계의 중심이 바뀔 것이라는 것도 당연히 몰랐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눈으로 확인되는 것만 믿을 뿐이었다. 21세기의 어린이들이 어떤 과학문명의 혜택을 받으며 자랄 지에 대해서도 무관심했다(오불관언!). 아이들이 누구나 자신의 마법 능력을 뽐내며 살아갈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것도 예견치 못했다. 누구나 마법사가 되는 시대가 곧 온다는 것을 예견하지 못했다. 이제 아이들은 어떤 이야기 앞에서도 ‘망설임’ 없이 소통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괴담?). 중요한 것은 ‘구닥다리 서사구조’인가 아닌가가 아니었다. 낡은 마법 이야기의 재탕 여부도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을 어떻게 볼 것인가였다. 그거였다. 그걸 모르는 이들이, 그때도 많았고, 아직도 많다.
이 글도 ‘해리에 대해 쓰여 진 책들’ 중의 하나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작가의 희망은 현실이 되어 있다. 밑줄 친 부분은 맥고나걸의 음성을 빌리긴 하였으나, 실제로는 예언적 효과를 지닌 작가의 육성이다. 그 대목을 보면서 나도 그런 예언을 써 넣을 공간을 이 페북 어디엔가 슬쩍 끼워넣고 싶다. “이 사람들은 이 글을 절대 이해하지 못할거구만요!”라고 어디 써 넣을 데가 없나?
<오래 전 작성. 오늘 아침 일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