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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Dec 05. 2019

걸으면서 빛나는 여자

마작과 그라디바

걸으면서 빛나는 여자


청년기 때 고등학교 교사를 잠시 한 적이 있었다. 근무하던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관공서 인근에서 하숙을 했는데(조용해서 저녁에 책 보기가 좋았다), 주인집 아저씨가 자식 같은 나를 보고 꼭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밤마다 찾아와서는 마작(麻雀)을 권했다. 대학원을 다니며 밤낮으로 바쁠 때라 "어려운 룰을 배울 여가가 없다"라고 하니까, 자기가 쉽게 가르쳐 줄 거니까 염려말라는 거였다. "선생님 같은 (머리 좋은) 분들은 두어 판만 해 보면 금방 재미있게 놀 수 있다"고 꾀었다. 4 명이 한 조가 되어야 하는데 자리가 마침 하나 비었다며 꾸준하게 권했다. 나중에는 거의 강권하다시피 했다. 내 책상 위에 마작패를 늘어놓고 이것저것 설명도 하기도 했다. 퇴직 공무원이었던 아저씨는 낮에는 빨래나 설거지 등으로 아주머니를 도왔고, 밤에는 그 마작판에서 본인의 잡비를 벌어 썼다. 끝내 주인집 아저씨의 마작 권유에 견디다 못해 하숙집을 옮겼다. (조용하고 깨끗한 집이었는데 아쉬움이 컸다. 더구나 옮긴 하숙집이 대학생들이 많이 있던 집이라 공부에 많이 방해가 되었다. 결국 따로 방을 하나 얻고 매식을 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런데 그때는 원수 같던 마작이 요즘은 괜히 좋아 보인다. 가끔씩 영화에서나 페북에서 마작 이야기를 접할 때가 있는데 호기심이 동한다. "그때 좀 배워둘 걸"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아마 늙어서 시간을 보낼 좋은 게임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흐르는 것이 어디 강물뿐이겠느냐는 성인의 말씀이 하나 틀린 게 없다. 지나간 모든 게 다 일장춘몽이다.


프로이트의 『옌젠의 「그라디바」에 나타난 정신착란과 꿈』(1906)은 명작(名作)이다. 소설도 소설이지만 프로이트의 해설이 더 재미있다. 여러 사람이 인정했다. 내가 본 ‘인증서’만도 서너 편이 된다. ‘예술의 신비’를 말로 표현한 것 중에서는 아마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글이 아닌가 싶다.


...노르베르트 하놀트는 로마에서 어느 고미술품 콜렉션을 둘러보다가 어떤 얕은 돋을새김을 발견하고는 이례적으로 강한 인상을 받는다. 독일로 돌아온 그는 강한 인상을 받았던 문제의 얕은 돋을새김의 훌륭한 복제품을 구할 수 있었다. 그는 몹시 기뻐했다. 몇 년 전부터 그것은 사방의 벽이 선반의 책으로 도배되다시피 한 그의 연구실 한쪽에 얌전히 걸려 있었다. 햇빛이 이 얕은 돋을새김을 비추었으며 석양빛이 거기에 잠시 머무르기도 했다. 이 조각품은 걷고 있는 여인의 전신상을 표현한 것으로서, 실물 크기의 삼분의 일쯤 되었다. 그녀는 젊었다. 어린 소녀도 아니었으며 물론 성숙한 여자도 아니었다. 그녀는 스무 살 가량의 로마 처녀였다. 그녀는 비너스나 다이아나를 비롯한 올림푸스의 다른 여신들 또는 프시케나 님프가 표현된 그토록 흔한 다른 돋을새김을 전혀 상기시키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결코 적의를 가지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보통 사람의 어떤 것, ‘실제의’ 어떤 것이 있었다. 이를테면 마치 예술가가 오늘날처럼 종이에 대강 스케치를 하는 대신에 거리에서 살아 있는 사람의 옆을 급히 지나가면서 모델을 점토로 본을 떠서 만들어놓은 듯했다.<『프로이트와 문학의 이해』(4장)>


옌젠의 중편소설 「그라디바」의 서두 부분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노르베르트 하놀트는 고고학자다. 그래서 그의 진술이 지닌 고고학적 내포는 텍스트성이 있다. 그는 싸우러 나가는 마르스라는 듯의 로마 신 마르스 그라디부스(Mars Gradivus)의 이름을 따서 그 모델에게 ‘그라디바’라는 별칭을 붙인다(-부스의 us가 남성형 접미사라면 -바의 a는 여성형 접미사다).
그는 이 젊은 여자의 얼굴 모습과 거동이 우아하고 세련된 점으로 미루어 그녀는 서민의 딸일 리가 없고 분명히 귀족 집안의 아가씨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추론을 통해 그녀가 폼페이의 거리를 ‘비가 내린 날 신발이 물에 젖지 않도록 드문드문 놓인 포석(鋪石)만을 밟고 걸어가는’ 모습이 예술가에게 포착된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라디바’가 ‘조에-그라디바’를 거쳐 ‘조에 베르트강(걸으면서 빛나는 여자)’으로 밝혀지는 서사구조가 우선 재미있다. 거기까지는 옌젠의 선물이다. 지척에 두고 있으나 소원하기만 한 옛날 여자 소꿉친구를 ‘그라디바 환상’을 통해 다시 불러내는 과정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 다음 그 서사구조를 원용해서 인간의 정신 구조를 하나씩 설명하는 프로이트의 이야기는 한층 더 깊은 재미를 선사한다. 얼마나 재미가 있는지, 변태나 분열은 병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상적인 일탈, 하나의 정도의 문제일 뿐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그러나, 내가 ‘그라디바’에게 열광한 것은 그러한 옌젠이나 프로이트의 이야기(스토리 텔링?)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열광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오래 전에도 나와 같이, ‘걸으면서 빛나는 여자의 모습’에 열광한 사내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라디바를 묘사하는 대목을 처음 대했을 때 나는, ‘어쩌면 이렇게 내가 원하는 그림을 제대로 그려 놓았을까’라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일종의 페티시즘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젊어서 한 때 나는, ‘걸으면서 빛나는 여자’의 그림이나 사진에 매혹된 적이 있었다. 아마 외국 서적을 파는 가게에서 외국계 패션 잡지도 몇 권 샀을 것이다. 늘씬한 키에, 성장(盛裝)을 하고 활달하게 발걸음을 내딛는 여성들의 모습이 언제나 황홀했다. 특히 보일 듯 말 듯, 신체의 윤곽을 살짝 드러내면서 걷는 모습이 더 좋았다(그 시절, 연애가 지상의 과제이던 시절, 청바지가 잘 어울리던 아내가 드물게 치마를 입은 채 활달하게 걷던 모습이 유독 지금도 나의 뇌리 속에 선명하게 저장되어 있다. - 절대 아부 아님). 지금도 수집까지는 하지 않지만, 가끔씩 서점에 들렀을 때는 그때의 생각이 나서 꼭 한 번은 그쪽으로 눈길을 주는 정도의 관심은 가지고 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조금 확대된 추리가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는 염마저 든다. 혹시 ‘걸으면서 빛나는 여자의 모습’은 모든 사내들이 남모르게 가슴 속에 품고 있는 불패의 환상인 것은 아닐까? <그라디바>가 나만의 페티시즘이 아닌 것은 아닐까?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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