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대상화
돈을 많이 쓰거나 운동을 과하게 하거나
우리는 모두 불안을 안고 삽니다. 꿈은 우리가 스스로의 불안을 확인하는 공간입니다. 새벽잠에서 깨어나 잠시 내 꿈속의 주인공들을 일별해 봅니다(오늘은 꿈에서 가형을 만나 어머니가 홀로 사시는 시골집 주소를 확인합니다. 어머니와 따로 떨어져 산 적도 없고, '엄마 찾아 삼만리'와 같은 생애 경험은 더더군다나 없습니다. 왜 그런 분리불안이 갑자기 나타나는지 오리무중입니다). 꿈 속의 저는 여전합니다.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심술 많고 근심 많고 겁쟁이고 못난이입니다. 한 때는 꿈 속의 저를 '가르쳐서 사람으로 만들자'라고 생각해본 적도 있었습니다. 물론 요지부동, 그들(한 사람이 아닙니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저 보기만 합니다. 좀 오래 쳐다봅니다. 꿈의 기억이 사라지기 전, 그들을 제 앞에 불러세웁니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한 명 '불안의 주인공'과 작별합니다. 지난 밤 꿈 속에서 그가 한 말을 완전히 까먹습니다.
.
사람마다 불안(不安)을 다루는 방법이 다르다고 합니다. ‘불안의 대상화’라는 심리기제는 개체마다 각각 다르게 발달한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많이 먹거나 돈을 많이 쓰거나 운동을 과하게 하거나 일처럼 매일 싸움의 대상을 찾거나 무엇이든 수집해서 저장하는 일에 몰두하거나, 애인을 찾아 헤매거나 간에 유별난 것들은 모두 그런 '불안의 대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저를 한 번 돌아다 봅니다.
저의 첫째 대상화 기술은 글을 쓰는 것입니다. 글쓰기는 고전적으로 인정받는 대상화 방법입니다. 자기를 드러내는, 그래서 싸움의 대상을 특정하는, 검증된 효과적인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물론 나르시시즘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글쓰기는 그저 ‘앞으로 이기고 뒤로는 지는’ 일종의 자기기만에 불과한 것이지만요).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글쓰기는, 이드(id)의 영토에 자아(ego)를 보내는 일종의 파병(派兵)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위험한 게임이기도 합니다. 겉으로는 원주민들이 진주군에 고분고분한 것 같지만 어두운 곳에서는 항상 테러의 위험이 존재합니다. 어리숙한 에고는 총도 뺏기고 옷까지 벗겨집니다. 제대로 된 글쓰기는 어두운 곳을 밝게 비추는 단순한 ‘조명 효과’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평화유지군의 역할을 다 하려면 숨어있는 테러분자들, 이드라는 복병(伏兵)을 찾아내고, 그와 정면으로 맞서 싸우고, 결국은 그를 일망타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끝까지 자기를 발가벗기려는 투철한 ‘의지와 노력’을 요구합니다. 그야말로 ‘전쟁 효과’를 추구해야 합니다. 잘못된 체제와 관습을 완전히 말소시켜야 합니다.
검도 수련 역시 저의 전쟁터입니다. 쉬운 상대는 눈에 보이는 적이고 어려운 상대는 제 자신, 상대의 뒤에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적입니다. 눈앞의 적을 향해 공격성을 배출하지만 참기 어려울 지경까지 자신을 몰아넣는 극기(克己) 행위가 제 검도 수련의 요체입니다. 결과가 승리가 될 때 효과는 배가됩니다. 그것을 통해 ‘자신감’의 실체를 확인하고 배양합니다. 자신감을 관념이 아니라 몸으로 감지합니다. 불안은 자신감을 가장 싫어합니다. 완전한 상극의 관계입니다.
저는 또 모자에 집착합니다. 운동모자, 털실모자, 도리구찌, 중절모, 아마 다 꺼내 놓으면 수십 개는 족히 될 듯합니다. 그것이 제 나름 ‘불안을 대상화’ 하는 행태의 일종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제 아내는 저와 좀 다릅니다. 가방이나 지갑에 집착합니다. 모두 감싸거나 주워담는 도구들입니다. 자극적인 멜로드라마를 보거나(요즘은 사시사철 채널을 바꿔가며 '동백꽃'만 봅니다), 장시간 장거리 전화를 걸거나(미국 같은 곳에 있는 피붙이와의 전화는 그야말로 무목적적인 ‘순수한 대화’를 가능케 합니다), 시도 때도 없이 환호, 탄성, 고함을 지르는 것도 자신의 내부에서 암약하는 불안을 대상화하는 한 방법입니다. 그 덕에 저는 발에 차이는 아내의 가방들 때문에 소파에 마음대로 눕지 못하고, 그녀의 통화에 방해되지 않도록 소리를 죽여 글을 쓰거나, 한 번씩 영문 모르고 깜짝깜짝 놀라거나 하면서 삽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타자들의 ‘불안을 대상화하는 방법들’에 대해서 서로 놀라고, 혐오하고, 불편해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서로 자기를 표현하는 것에 당당하면서도 서로를 인정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삽니다. 아마 3,40년래에 이루어진 우리 사회의 한 급격한 변화양상인 것 같습니다. 타자의 존재방식에 대해서 거부감을 드러내는 방식도 다양합니다. 막간다, 체면이 없다, 천박하다, 엄숙성이 없다, 교양이 없다, 마초다, 의식이 없다, 조급증이다, 꼰대 문화다 등등, 거부감의 표현도 다양하게 ‘범람’합니다. 이른바 신세대인 '김지영 세대'나 '90년 세대'들은 더합니다.
‘모태 불안’이라는 말까지도 나올 법합니다. 그들에게는 사회적 요인의 불안(메타인지적)이 거의 생래적인 것처럼 고착되어 있습니다.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냉소가 내장되어 있습니다.우리 구세대가 오랜 기간에 걸쳐 습득한(?) 히스테리(히스트리오닉 성격장애)를 그들은 거의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것 같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없어지면, 전면적으로 모태 불안증 소유자들만의 세상이 오면, 우리가 앓던 히스테리아와 같은 ‘원인 모를 병’들은 이 세상에서 아예 없어질 지도 모르겠습니다. "혼자 있으면 외롭고 둘이 있으면 괴롭다"가 누구나 인정하는 도덕률이 되면 '갈등' 자체가 의미를 잃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등'은 ‘풀 수 없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조화를 추구하는 코스모스 지향의 세계에서나 발생하는 것입니다. 코스모스 자체를 포기한 세상에서는 ‘갈등’ 자체가 의미를 잃고 말 것입니다. 오직 화이부동(和而不同), 만물이 병발(倂發)할 뿐, 정(正)과 반(反)도, 중심과 주변도, 아예 존재하지 않는 그런 세상이 오면 지금처럼 늘 ‘불안을 대상화’해야 하는 일도 사라지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