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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04. 2019

글쓰기 인문학 10강

제5강. 공성지략, 제목을 이기는 글쓰기

5. 공성지략(攻城智略), 제목에 이기는 글쓰기

     

불신의 성벽을 뚫어야  

   

글을 쓴다는 것은 공성(攻城, 성이나 요새를 공격함)과 같다. 글(책)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읽어주는 것은 절대 아니다. 믿는 사람이 아니면 절대 돈을 빌려 주지 않는 것처럼, 독자들은 믿는 작가가 아니면 결코 읽어주지 않는다. 시간과 노력과 돈을 써 가면서 남의 글(책)을 읽어준다는 것은 굉장한 호의(好意)다. 글을 쓸 때는 그 점을 명심해야 한다. 글을 써서 독자를 얻는 일은 기습전을 치르는 일과 같다. 개전(開戰) 초기에 효과적으로 공격해서(화력을 집중해서) 독자의 불신의 성벽을 뚫고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지지부진하게 싸움을 끌고 일진일퇴 하다가는 종내 적진에 내 깃발을 꽂지 못하고 패퇴하게 된다. 성을 쌓고 지구전을 벌이는 적에게 꼼짝없이 당한다. ‘제목에 이긴다’는 것은 글쓰기 공성의 첫째 기술이다. 강력한 돌파 무기로 굳게 닫힌 성문(城門)을 뚫고 성 안으로 들어가는 정공법이다. 보통 재능 있는 시인들이 ‘단단하고 위태로운 것’으로 자신의 시 제목을 삼고 본문에서 그 제목을 확실하게 눌러 독자의 감복(感服)을 받아내는 것도 정공법이 확실한 승리를 보장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글쓰기론의 고전이라 할 만한 연암 박지원의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을 살펴보자. 

연암(燕巖)의 글쓰기론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을 읽다보면 저절로 탄성을 지르게 된다. 한 마디 한 마디, 글쓰기 절정 고수의 면면을 보여주는 글이다. 젊어서 이 글을 볼 때는 그렇게 감동적이지 않았다. 한 논문에서 그 해설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당시로는 별반 감흥이 없었다. 아마 그때는 내 글쓰기 역량이 연암의 요약(要約)을 받아들일 만큼 준비되지 못했던 것 같다. 공연히 헛것을 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후회도 되고 반성도 된다. 하여튼, 젊은 날에는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이 그저 그랬었다. 그런데 요즘 와서 읽어보니 보통 글이 아니었다. 그 안에 있는 한 마디 한 마디의 요약들이 화살처럼 날아와 내 폐부를 뚫고 지나간다. 그동안 글을 써 오면서 어렴풋하게나마 깨친 것, 무심결에 습관으로 자리 잡은 것, 반신반의 하던 것들이 모두 그 안에 있었던 것이다. 실로 감복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연암의 문체는 특별하고 중독성이 있다. 그의 글쓰기론에서도 여지없이 그런 개성이 잘 드러나고 있다. 무작정 고문(古文)을 따르지 않고 때를 알아 자유분방을 취하는 모습이 때론 황홀한 느낌마저 선사한다. 한문(漢文)에는 까막눈인 주제에 그 실상을 자세히 파헤친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지만, 대표적인 몇 문장만 봐도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아마 자기만의 신의(新意, 창의적인 생각)를 중히 여겨 용사(用事, 옛 글을 인용)의 편의를 가급적 사양하는 데서 오는 결과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 중에서 우리 글쓰기에 꼭 필요한 부분만 떼어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글을 잘 짓는 자는 아마 병법을 잘 아는 자일 것이다. 글자는 비유컨대 병사이고, 뜻은 비유하면 장수이다. 제목이라는 것은 적국(敵國)이고, 전장(典掌, 전거를 인용하는 것) 고사(故事)는 싸움터의 진지이다. 글자를 묶어 구절이 되고, 구절을 엮어 문장을 이루는 것은 부대의 대오행진과 같다. 운으로 소리를 내고, 사(詞, 시문의 말)로 표현을 빛나게 하는 것은 유격의 기병이다(징과 북을 울리고 깃발을 휘날리는 것과 같다). 앞뒤 문맥을 서로 맞추는 것은 봉화(烽火)를 드는 일이고, 억양반복이라는 것(문장의 기세를 억누르기도 하고 추켜세우기도 하며 뒤집기도 하는 것)은 끝까지 싸워 남김없이 죽이는 것이고, 제목을 깨뜨리고 나서 다시 묶어 주는 것은(破題, 과거 답안지의 첫머리에서 시험 제목의 의미를 먼저 설파하는 것) 성벽을 먼저 기어 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이다.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군자(君子)는 부상자를 거듭 상해하지 않고 반백의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다.”고 한 것과 같으며, 여음이 있다는 것은 군대를 떨쳐(정돈하여) 개선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병법을 잘하는 자는 버릴 만한 병졸이 없고, 글을 잘 짓는 자는 가릴 만한 글자가 없는 것이다. 글이 좋지 않은 것은 글자의 잘못이 아니다. 저 글자나 구절의 우아하고 속됨을 평하고, 편과 장의 높고 낮음을 논하는 자는 모두, 합하여 변하는 기미[합변지기(合變之機)]와 제압하여 이기는 저울질[제승지권(制勝之權)]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합하여 변화하는 저울질이란 것은 때에 달린 것이지 법에 달린 것은 아니다.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인용자 일부 편집]   

   

글쓰기를 전투에 비유하는 한편, 연암은 뒤이어 글이 지녀야 할 ‘결’을 강조한다. 물에 물결이 있고, 살에 살결이 있으며, 바람에 바람결이 있듯이 글에도 결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 이치를 얻지 못하고 글을 쓴다면 아무리 고담준론을 펼쳐도 좋은 글이 되지 못한다고 연암은 강조한다. 일상의 평범한 소재, 일상의 평범한 언어도 그 이치에 맞게만 사용되면 훌륭한 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 한 마디, 모두 글쓰기의 금과옥조(金科玉條)가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글쓰기 최고 이론이다. 연암의 말대로 ‘억양반복’을 가미하자면 가히 동방불패의 규화보전(葵花寶典)이고, 미야모도 무사시의 오륜서(五倫書)이다. 불패의 병법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단연 독보, 독창적인 문장론이다. 이미 본문에 충분한 해설이 되어 있지만 현대적 의미를 보태어 조금 더 그 뜻을 풀어 보자면 다음과 같다.

* 글자는 병사, 뜻은 장수 : 뜻을 살릴 수 있는 단어와 구절. 그것의 운용에 관한 말. 장수는 병사를 잘 알아야 하고 병사는 장수를 잘 따라야 한다. 뜻과 표현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용장 밑에 약졸 없듯이 일단 좋은 뜻을 품기 노력해야 하고 그 표현법을 병사 훈련시키듯 연마해야 한다. 

* 제목은 적국, 전장 고사는 싸움터의 진지 : 제목은 주제이니 그것을 완전히 굴복시키는 것이 글쓰기의 최종 목표다. 전장 고사가 진지라는 것은 제목(적국, 주제)에 눌려 죽지 않기 위해서는 진지 안에 들어가(확실한 논거를 찾아) 그것에 대적해야 한다. ‘제목에 지지 않는다’라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가급적이면 독자들이 글을 다 읽고 다시 한 번 제목으로 눈길을 돌리도록 해야 한다.   

* 운과 사(詞)의 유격병 역할 : 정규군(主旨)을 돕는 유격병(韻律)을 잘 활용해야 한다. 모든 글은 소리 내어 읽는 것을 전제로 한다. 묵독도 예외는 아니다. 두운, 압운, 음보, 속도감 있는 문장 연결 같은 것에 유념해야 한다. 유격이 본진의 공격력을 최대화할 수 있도록 유념한다. 단, 유격의 유희(遊戱)가 지나치게 승해 본진의 존재 자체가 묻혀버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 억양반복은 끝까지 싸워 남김없이 죽이는 것 : 프로는 항상 끝까지 싸워 남김을 두지 않는다. 표현의 최대치를 찾는다. 과장도 필요할 때가 있고 반복도 중요할 때가 있다. 마지막 한 줄로 전체 문장을 뒤집는 일도 가능하다. 촌철살인(寸鐵殺人), 마지막의 한 문장으로 지금까지의 모든 것들을 뒤집을 수 있으면 가차 없이 뒤집는다. 그런 뒤집기가 최고의 글쓰기다.

* 제목을 깨뜨리고 나서 다시 묶어 주는 것은 성벽을 먼저 기어 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 : 승기를 잡는 결정적인 계기는 편견과 고정관념, 불신의 장벽을 넘어 독자의 승복을 받아내는 데서 비롯된다. 시작부터 독자들의 불신의 성벽을 깨뜨리는 전략이 필요하다. 공격이 기습적으로 이루어질 때 효과도 크다. ‘제목을 깨뜨리고 나서 다시 묶는 일’은 진정한 문예적인 글들이 주로 취하는 ‘아이러니의 형식’과도 상통한다. 극적 아이러니, 운명적 아이러니 등과 같은 말은 결과적으로 ‘제목을 깨뜨리고 다시 묶어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반백의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고, 여음이 있다는 것은 군대를 떨쳐 개선하는 것 : 함축은 ‘의미가 노는 곳’이기에, 함축을 활용하는 것은 전쟁을 치를 때 부상자와 늙은 병사를 놓아주는 이치와 같다. 독자의 능동적인 의미 구성을 독려한다. 사족(蛇足)인 듯하지만 덧붙임을 두거나 은근한 여운을 남기는 것은 글의 품격을 높이는 일이고, 독자의 참여를 위한 작가 측의 배려라고 할 것이다.

* 합하여 변하는 기미[合變之機]와 제압하여 이기는 저울질[制勝之權] : 코드와 맥락의 운용에 필요한 시의(時宜)를 알고 주지를 거스르는 것들을 억눌러 적절하게 문맥을 통어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통째로 눈치껏’, 자신이 지닌 문식력을 통일적으로 크게 활용하여야 한다. “아는 것만으로는 항상 부족하다”라는 격언을 명심해서,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도록 글자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에 얽매이지 않고 글 전체의 ‘결’에 유념하여야 한다.  

* 때에 달린 것이지 법에 달린 것은 아니다. : ‘확연이대공 물래이순응(廓然而大公 物來而順應)’, 때를 안다는 것은 자기를 비우는 일에 다름 아니다. 상황을 순순하게 받아들여 당면한 글쓰기가 요구하는 적절한 맥락을 잡아내야 한다. 법(코드)은 그 ‘순응’의 결과에 종속될 뿐이다. 오늘의 코드와 맥락이 내일의 오해와 편견이 되는 것이 인생사다. 항상 ‘때’에 순응하여(자기의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에 휘둘리지 않고) 매사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한다.

      

글이란 것은 간혹, 독자에 따라서 그 본래의 취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때가 있다. 처한 입장이나 환경에 따라 전달되는 메시지의 맥락적 이해가 서로 조금씩 다를 수가 있는 것이다. 연암의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은 글쓰기가 어느 정도 숙련 상태에 접어든 사람들에게 그 속의 가르침이 크게 들리는 글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젊어서는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이 그렇게 감동적이지 않았다. 그때는 생각이 많았다. 새 시대에는 당연히 새 글쓰기론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평생을 살아도 그런 건 없었다. 백발이 되도록 우왕좌왕, 수십 권의 책과, 수천 편의 짧고 긴 글들을 써 오면서 비로소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보니 그 안에 다 있었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그 안에서 그것들을 볼 수 있어서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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