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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03. 2019

통도사 가는 길

첫사랑과 헤어진 삼랑진 역

통도사 가는 길


「통도사 가는 길」(조성기)을 다시 읽었다. 30년 만의 재독이다. “움직이는 정신의 항구에 한 번 정박했던 배는 반드시 다시 돌아온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어딘가에서 한 번 썼던 말인데, 창작인지 인용인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인문학 하는 이들이 늘 그러하듯, 보통은 술이부작(述而不作)인데 가끔씩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생각나는 대로 쓰다 보면 기대를 넘어 앞뒤가 통할 때도 있다. 그냥 떠오르는 것인데 써놓고 보면 그럴듯할 때도 있다. 책 읽는 데도 그 비슷한 이치가 있다. 그냥 책이 손에 잡혀서 읽는데 책의 내용이 그동안 막혀 있던 곳을 시원하게 뚫어줄 때가 있다. 그래서 책의 진정한 가치는 보통 재독(再讀) 때 발견된다. 사람 만나는 이치와 같다. 초독(初讀)은 그저 상대의 얼굴만 알아보는 정도다. 첫인상이 좋다고 꼭 좋은 반려자가 되라는 법은 없다. 살아 봐야 좋고 나쁘고를 알 수 있다. 책 읽기도 마찬가지다. 그 내용을 겪어본 뒤에야 다시 제대로 책과 만날 수 있을 때가 있다. 내 콘텍스트 안에 텍스트가 들어와야 비로소 저자와의 대화가 성사된다. 한 번으로는 늘 부족하다.

겉보기에, 재독은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재독이란, 성공적인 연애에 있어서의 모든 재회(再會)들이 다 그러하듯, 겉보기에 우연의 탈을 쓰고 나타날 뿐,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미 초독 때 계획이, 그 일정이, 잡힌 일이다. 물론 그건 무의식의 관할이다. 의식적 차원에서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진행된다. 그 미션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참을성 있게, 움직이는 정신의 항구가 열리는 때를 기다린다. 항로가 열리고 다시 배가 돌아올 때는, 보통은 밤이어서, 불 밝힌 부두의 화려찬란(華麗燦爛)이 꽤 볼만하다. 그래서 두 번째 만난 옛 애인이 더 볼 만하다. 거듭 말하지만 이 세상에 우연한 재독이라는 것은 없다. 재독에 있어서 우연(偶然)은 항상 모순어법이다.


우연을 가장하고, 내 정신의 항구에 다시 돌아온 「통도사 가는 길」은 예전처럼 큰 배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기품은 그대로였다. 거친 파도와 싸우며 많이 지친 모습이기도 했지만 단아한 자태는 여전했다. 수척했지만 차라리 나았다. 언제부터였는지, 선수(船首)에는 전에 없던 '고집멸도(苦集滅道)'라는 선적지도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비로소 전체가 눈에 들어왔다.
통도사 대웅전 불단에는 부처가 없다. 그 뒤 금강계단 석종 부도에 불골(佛骨)과 불가사(佛袈裟)가 모셔져 있어 따로 부처의 상을 두지 않는다는 취지다. 「통도사 가는 길」에서 묘사된 그 대목을 인용한다. 버리는 것, 사라지는 것, 견디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에 있는 생명. 아마 그런 것들을 말하고 있는 대목인 듯싶다(그 언저리에서 묘사되는 육체적 에로티즘도 볼만했지만, 이 글의 주제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그 부분은 약(略)한다).


... 그것은 허공이었습니다. 허공으로 인한 충격이 나를 내려앉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광경에 넋을 잃어버렸습니다.
불단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붉고 푸른 연화문으로 정교하게 장식된 3층 불단은 그 너머 허공으로 통해 있었습니다. 그 허공은 막연한 형태로가 아니라 가로누운 긴 직사각형으로 반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단아한 허공이었습니다. [중략]
한 순간, 5층 석탑의 무게로 나를 내리누르고 있던 그녀의 존재가 시선이 머물고 있는 허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자 나마저도 허공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그녀도 없고 나도 없었습니다. 다만 텅 빈 삼랑진역 플랫폼에 어머니만 홀로 서 있었습니다. 허공 속에서도 법당 뒤편 금강계단의 석종 부도 꼭대기가 마치 선덕여왕의 한쪽 유방처럼 봉긋이 떠 있었습니다. 그 유방의 젖을 먹고 자라는 듯 금강계단 너머로는 신선한 녹색의 숲이 우거져 있었습니다. 나는 그 석종 부도 속에 모셔져 있다는 싯달타의 사리마저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기를 바랐습니다. [조성기, 「통도사 가는 길」 중에서]


「통도사 가는 길」을 다시 읽고 내가 한 일은, 엉뚱하게도, 삼랑진역을 다시 찾는 노고(勞苦)였다. 삼랑진역은 몇 개의 각각 분리된, 그러나 하나인 이미지로 내게 저장되어 있었다. 
다시 찾은 삼랑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역사 앞의 중국집도, 덜컹거리는 두 칸짜리 전동차 안에서 헤어진 첫사랑도, 경전선과 경부선을 오고 가던 내 비굴과 남루도 그곳에는 없었다. 그저 지루하고 남루한 시골 풍경만 있을 뿐이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망연히 섰다가 역 앞 철물점에서 고무호스를 3m 샀다. 요즘 들어 떼 지어 몰려드는 비둘기들이 골치였다. 높이가 자신들의 비행 코스에 알맞은 우리 집 창틀에 앉아서 구구 거리며 양광(陽光)을 즐겼다. 창밖의 비둘기 똥을 물로 씻어내려면 그 정도의 길이는 필요했다. 수십 년 전, 그 역사 앞 중국집에서 나는, 부산으로 갈 것인지 마산으로 갈 것인지를 어머니에게 묻던 젊은 아버지의 그 끝 모를 무력감에 절망했었다. 그 절망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나는 일찍이 아버지 곁을 떠났다. 요령부득, 그저 삼랑진을 경유해 경전선에서 경부선으로 내 몸을 옮겨 실어야 했다. 그 와중에 첫사랑과의 마지막 이별도 거기서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어느 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깨끗하게 리모델링한 삼랑진 역사만 있을 뿐이었다. 마치 통도사의 불단처럼 그곳에는 내가 기대했던 그 어떤 그림도 없었다. 그저 텅 비어 있었다. “불단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붉고 푸른 연화문으로 정교하게 장식된 3층 불단은 그 너머 허공으로 통해 있었습니다.” 복층의 현대식 역사는 시원한 유리창으로 통째로 덮여있었다. 그렇게 보였다. 그 어디에서도, 옛날의 그 뾰죽지붕, 그 길게 늘어진 그림자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삼랑진이 내 어린 날의 통과제의가 되지 않을 무렵, 내게 문학은 운명적으로, 일종의 구원으로 다가온다. 소설을 쓰게 되고, 그것은 불패의 환상으로 나를 위무했다. 나는 그때 문학이야말로 나의 첫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세상을 처음 사랑한 방법이었다. 그렇게 나는 첫사랑을 바꾸었다. 그러면서 한 동안 잊고 지내던 그 옛날의 첫사랑이 다시 나를 찾은 건 <박하사탕>(이창동, 2000)을 보면서였다. <박하사탕>은 거꾸로 가는 기차 장면으로 막과 막을 잇는다. 그때마다 시간은 과거로 흐른다.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서사 기법을 사용해 현재를 만드는 단 하나의 과거만을 생각하라고 권했다. 그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그 영화에서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첫사랑에 대한 작가의 오마쥬였다. 어떤 거룩한 것도 첫사랑 앞에서는 무력하다. 영화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도 언젠가 내 첫사랑을 찾을지도 모르겠다는 예감마저 들었다. 삼랑진역을 찾은 것은 바로 그런 연유에서였다. 나는 사람을 찾는 대신 이별의 장소를 찾았다. 그게 맞는 일인 것 같았다.(첫사랑과 삼랑진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던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룬다)


사족 한 마디. 성속(聖俗)을 막론하고, 결론은 어디서나 ‘생명’인 것 같다. 생명 앞에서 엄숙할 것. 사라진다는 것에 대해서 아쉬워 말 것. 버릴 것은 버리고 화해할 것과는 화해할 것, 새 생명에게는 언제나 새 마음으로 격려를 보낼 것, 그것이 마지막으로 찾은 삼랑진이 내게 가르친 것이지 싶다. 비둘기 똥에 대해서도 좀 더 관대해지기로 했다. 물론 아직도 지켜야 할 윤리를 따지고 구해야 할 성불을 논하고 필승의 일자진(一字陣)을 꿈꿀 수도 있다. 아직 그만한 나이는 된다고 여기는 친구들도 꽤 있다. 로렌 아이슬리가 죽기 몇 년 전, 7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자신이 나이가 들었다고 느꼈다고 토로했던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생명 앞에서는 좀 겸손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생명은 그 자체가 신비다. 비어 있는 것, 딱딱한 것, 보이지 않는 것들이 어느 순간 빈틈없이 가득 찬 것, 물렁물렁한 것, 시원하거나 따뜻한 것, 보기에 아름다운 것이 되어, 눈과 손과 신체의 즐거움, 그 지극함을 알게 하고, 서로를 황홀한 느낌으로, 가슴 졸이며, 갈구하도록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신비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이러니다. 그 생명의 신비가 생명의 끝자락에 가서야 뼈저리게 실감이 된다니 그 또한 아이러니다. 모든 것이 신비고 아이러니다. 첫사랑도.
<오래전 작성.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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