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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08. 2019

글쓰기 인문학 10강

제7강 - 여운을 남기는 글쓰기

7. 군자불기(君子不器)여운을 남기는 글쓰기 


반백의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고


글쓰기 인문학 응용 편의 마지막 장은 함축과 여운에 대한 것이다. 일찍이 연암이 말한 바대로 좋은 글이 되려면 울림이 커야 한다. 독자 쪽에서의 적극적인 협화(協和)가 필수적이다. 판소리에서도 귀명창이 가장 우선이듯이, 글쓰기에서도 독자의 공명이 가장 우선이다. 연암이 함축과 여운을 강조한 것은 언어가 가진 생래적 한계를 글쓰기 체험을 통해 몸으로 안 결과였다. “군자는 부상자를 거듭 상해하지 않고 반백의 늙은이(도주하는 나이 든 병사)를 사로잡지 않는다.”라는 말은 언어를 운용하는 올바른 태도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평소에 강조하는 글공부에서의 ‘통째로 눈치껏’ 학습 원리와도 의미가 상통하는 것이다. ‘소단적치인’에서 그 부분만 다시 인용해서 함축과 여운의 요점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군자(君子)는 부상자를 거듭 상해하지 않고 반백의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다.”라고 한 것과 같으며, 여음이 있다는 것은 군대를 떨쳐(정돈하여) 개선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병법을 잘하는 자는 버릴 만한 병졸이 없고, 글을 잘 짓는 자는 가릴 만한 글자가 없는 것이다. 글이 좋지 않은 것은 글자의 잘못이 아니다. 저 글자나 구절의 우아하고 속됨을 평하고, 편과 장의 높고 낮음을 논하는 자는 모두, 합하여 변하는 기미[합변지기(合變之機)]와 제압하여 이기는 저울질[제승지권(制勝之權)]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합하여 변화하는 저울질이란 것은 때에 달린 것이지 법에 달린 것은 아니다.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반백의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고, 여음이 있다는 것은 군대를 떨쳐 개선하는 것이다.”라는 말은 앞에서 말한 바대로 언어를 운용하는 올바른 태도에 관한 말임과 동시에 글쓰기의 최종적 완성도에 미치는 함축과 여운의 힘에 대한 말이다. 글의 품격과 전달력에 함축과 여운이 큰 영향을 끼친다는 말이기도 하다. 글이란 그저 뜻만 전달하고 마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수단만 되는 것이 아니다. 반토막짜리 불편한 문장으로 전달되는 전보문에서부터 몇 권짜리 책으로 발간되는 대하소설에 이르기까지 모든 글쓰기의 최종 목표는 감동이다. “모든 걸출한 과학자들이 마지막으로 하는 일은 언제나 인류를 감동시키는 일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딱딱한 글이라도 읽는 이의 감동을 마다하는 글은 지구 상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품격 있는 글과 감동을 주는 글을 쓰는 것은 모든 글 쓰는 자들의 공통적인 바람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연암은 글의 품격을 좌우하는 요소로 함축(含蓄)과 여운(餘韻)을 들었다. 함축은 깊은 뜻(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을 품는 것이고, 여운은 감동의 자취가 길게 남는 것이다. 함축은 ‘의미가 노는 곳’이다. 이때 ‘놀다’라는 말은 ‘여유 있게 움직인다’라는 뜻을 가진다. 의미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이리저리 움직인다는 뜻이다. 읽는 이의 소양과 성품에 따라서 이런저런 의미가 공존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연암은 함축을 활용하는 것이 전쟁을 치를 때 부상자와 늙은 병사를 놓아주는 이치와 같다고 한 것이다. 작가가 글 속의 모든 의미를 깡그리 관장하지 않고 독자가 참견할 수 있는 소지를 어느 정도 남겨두라는 뜻이다. 요즘 말로 바꾼다면, 독자의 능동적인 의미 구성을 독려해야 한다는 말이다. 은근한 여운을 남기라는 말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심전심, 작가와 독자가 공유하는 공감의 여진(餘震)이 가능하면 길게 지속될 수 있는 ‘노는 공간’을 말미에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감동적인 글쓰기가 완성된다고 연암은 강조한다. 예시가 될 수 있는 글 한 편을 소개한다. 


<박학하였으나 이름을 낸 것이 없는>


글을 쓰다 보면 괜히 자기를 고집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요구나 반응을 애써 무시하고플 때가 있습니다. 누가 뭐라든 나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싶습니다. 내용뿐만이 아닙니다. 표현에서도 나만의 스타일을 드러내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읽기 어렵다, 비약이 심하다, 좀 풀어서 써 달라, 등등 독자들의 요구는 한결같이 “좀 편하게 읽자”입니다. 그렇지만 사람 사는 일이 꼭 편해야 되는 것도 아닙니다. 집안에 앉아서 ‘세계테마기행’을 보는 것을 즐기는 사람도 있고, 목숨을 걸고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듯한 것을 좋아하는 이도 있고 울퉁불퉁한 것을 좋아하는 이도 있습니다.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내 글을 원하는 이가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해 글을 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글은 곧 사람이다”라는 말도 있는 모양입니다. 사람마다 다른 게 글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글쓰기 일반론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법과 때’와 같은 것은 글 쓰는 자라면 누구나 고려해야 할 사항입니다. 법(法)이 중요할 때가 있고 때(時)를 높이 쳐야 할 때도 있습니다. ‘독자의 참여 공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깡그리 적당(敵黨)을 섬멸해서 적진에 높이 내 깃발을 꼽아야 할 때도 있고 적이라도 늙은 병사는 뒤 쫓아 사로잡기를 그만두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젊어서는 ‘법(法)’을 간과하는 글들이 때로는 ‘형정(刑政)의 문란’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독자의 참여’를 위해서 주술관계나 수식관계를 비틀거나 비약을 과하게 하거나 좀 생경스런 단어를 우정 골라 쓰는 것이 눈에 거슬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그런 것들에 대해 너그러워집니다. 그것들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가 절로 이해됩니다.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에 보면 ‘때와 법’을 논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강조의 필요’로 일상의 문맥을 다소 무시하는 부분도 있어 읽기의 재미를 배가시키기도 합니다.


... 공자께서는 이(利)와 명(命)과 인(仁)을 드물게 말씀하셨다. 달항당(達巷黨)의 사람이 말하기를, "위대하구나 공자여! 박학하였으나 (어느 한 가지로) 이름을 낸 것이 없구나." 하였다. 

공자께서 들으시고, 제자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장차 무엇을 전문으로 잡아야 하겠는가? 말 모는 일을 잡아야 하겠는가? 아니면 활 쏘는 일을 잡아야 하겠는가? 내 말 모는 일을 잡겠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삼베로 짠 관(冕旒冠)을 쓰는 것이 예법에 맞지만, 지금 사람들은 생사(生絲)로 만드니 검소하다. 나는 여러 사람들(時俗)을 따르겠다. (신하가) 당(堂) 아래서 절하는 것이 예법에 맞는데 이제 와서는 당 위에서 절을 하니 이는 교만한지라 비록 대중과 어긋나더라도 나는 당 아래서 절하겠다." 하였다.

공자는 네 가지의 마음이 전혀 없었으니 사사로운 뜻(편협되게 뜻함)이 없고 기필하는 마음(장담함)이 없고 집착하는 마음(고집함)이 없고 이기심이 없으셨다. 

공자께서는 광(匡) 땅에서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셨을 때 말씀하시기를, "문왕이 이미 돌아가셨으나 그가 남긴 문화는 이제 나에게 있지 아니하느냐? 하늘이 장차 이 문화를 없애버리려 했다면, 후세 사람들이 이 문화에 더불지 못하려니와 하늘이 이 문화를 없애지 않을진대, 광 땅의 사람들이 나를 어찌하겠느냐?" 하였다.(子罕言 利與命與仁. 達巷黨人曰 大哉 孔子. 博學而無所成名. 子 聞之 謂門弟子曰 吾何執. 執御乎. 執射乎. 吾執御矣. 子曰 麻冕 禮也 今也純儉 吾從衆. 拜下禮也 今拜乎上 泰也 雖爲衆 吾從下. 子絶四 毋意 毋必 無固 毋我. 子畏於匡曰 文王旣沒 文不在玆乎.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 天之未喪斯文也 匡人 其如予何.) [『논어』 「자한」편]


『논어』 「자한(子罕)」편의 서두는 인문학(자)의 요체를 일목요연하게 밝히고 있는 부분입니다. 사람 되기(成己)에 힘을 쓰는 공부에는 의(義)를 해칠 일이나, 신비주의에 빠질 일이나, 구름 잡는 이야기가 결코 소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리고는 말단지엽적인 것에서 세속의 명성을 구하지도 말라고도 타이릅니다. 그것보다는 ‘말을 잘 몰아서 마차에 탄 사수(射手)의 활이 적당(敵黨)에게 바로 꽂힐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일마부 이사수(一馬夫 二射手)’라는 것이지요. 

법과 때는 상호텍스트적이라는 것도 윤리적인 관점에서 친절하게 풀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법을 지켜야 할 때와 시속을 따라야 할 때는 오로지 윤리적인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문화(인문학)가 전승되는 것에는 천명(天命)이 게재되어 있는 것이어서 인력으로는 함부로 어찌할 수 없다는 엄숙장엄한 부분에 가서는 불초 시골무사라도 어쩔 수 없이 다소곳이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이 볼품없는 ‘인문학 수프’라도 좌고우면 할 것 없이 걍 밀고 나가자라는 만용(蠻勇)마저 솟구칩니다). 

그런 위의 내용 중에서도 특히 제가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말을 모는 일을 잡겠다’라는 공자님의 말씀입니다. 먼저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그 부분에 대한 주석을 살펴보겠습니다.


... 집(執)은 전문(專門)으로 잡는 것이다. 사(射)와 어(御)는 한 기예인데 어는 남의 마부가 되는 것이어서 잡는 일이 더욱 비천하다. “나로 하여금 어느 일을 전문으로 잡아서 이름을 이루게 하려고 하는가? 그렇다면 나는 장차 말 모는 일을 잡겠다”라고 말씀한 것이다. 이는 남이 자신을 칭찬하는 말을 듣고서 겸사(謙辭)로써 받으신 것이다.

윤 씨가 말하였다. “성인은 도가 온전하고 덕이 완비되어 어느 한 가지 장기(長技)로 지목할 수 없다. 그러나 달항당 사람은 공자의 위대함을 보고서 생각하기를 그 배운 것이 넓으나 어느 한 가지 잘함으로 세상에 이름을 얻지 못했음을 애석히 여겼다. 그러하니 성인을 흠모하였으나 성인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로 하여금 무슨 일을 전문적으로 잡아서 이름을 얻게 하려고 하는가? 그렇다면 말 모는 일을 잡겠다’고 하신 것이다. [성백효 역주, 『논어집주』 자한 第九]


사(射)와 어(御)는 육예(六藝)에 속하는 것입니다.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 등 육예는 고대 중국의 테크노크라트 사(士)들에게는 벼슬길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교과목이었습니다. 공자님이 “말 모는 일을 잡아야 하겠는가? 아니면 활 쏘는 일을 잡아야 하겠는가?”라고 반문하신 것에는 바로 그런 시대적 배경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어느 전문 과목 하나에서 특별한 명성을 얻은 이들도 다수 있었을 겁니다. 공자님은 그러한 전문인들이 나타날 수 있는 총체적인 기반(基盤)으로서의 인문학을 ‘말 모는 일’에 비유하신 것으로 읽힙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나라의 규모를 ‘승(乘)’으로 나타냈습니다. 제법 규모가 있는 큰 나라를 보통 ‘천승지국’이라고 불렀습니다. 주대(周代)의 제도(制度)에 전쟁이 일어나면 큰 제후(諸侯)는 병거(兵車) 천승(千乘)을 내놓는 풍속이 있었다 합니다. ‘승’이 바로 말이 끄는 이인승 전차(兵車)를 세는 단위였던 것입니다. 병거에는 두 사람이 탑니다. 한 사람은 말을 몰고 한 사람은 활을 쏩니다. 말 모는 자의 기술이 원활해야 활의 적중률을 높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공자님은 바로 그런 뜻에서 ‘내 말 모는 일을 잡겠다(吾執御矣)’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 일이 비천한 일이라서 겸사로 그리 말씀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당신의 인문학에 대한 당대의 시속을 빌려온 비유였던 것입니다.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나로 인해 세상의 빛나는 문화가 가능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모든 것이 생성될 수 있는 위대한 어머니, 그 대지(大地)의 모성(母性)처럼, 당신의 학문은 세상 모든 문화의 바탕이 되는 것이라는 자부심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말 모는 일’에 대한 공자님의 가르침은 학문(특히 인문학)이 기껏 한 전문 분야에서 특출나 이름 석자를 날리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천명(天命)이 함께 하는 것이기에 인간의 욕망이 그것 안에 거(居)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렇게 읽는 게 맞지 싶습니다.

인문학은 결국 글쓰기입니다. 글쓰기 없는 ‘인문학’은 허명에 불과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님이 직접 쓴 글을 접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때도 가끔 있습니다. ‘말씀’의 기록만으로 공자님의 ‘사람됨’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이지요. 인문학은 사람과 사람의 접속을 전제로 한 것인데 공자님의 체온을 직접 느낄 수가 없어서 서운할 때가 많습니다. 본디 큰 스승들은 조술(祖述)하되 글로 자신의 뜻을 한 군데에 고정시키지 않고 말로써만 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쉽습니다. 그래서인지, 『논어』의 저자들은 가급적이면 공자님의 말씀을 원형대로 보존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그 노력이 언제 읽어도 새로운 느낌(가르침)을 주는 고전(古典)으로서의 가치를 『논어』에 부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만용이지만 저도 말 모는 일을 잡고 싶습니다. "위대하구나 공자여! 박학하였으나 (어느 한 가지로) 이름을 낸 것이 없구나."라는 식의 비웃음을 한 번은 꼭 받고 죽고 싶습니다. <양선규, 페이스북, 2019. 3. 8>


인용된 예시문 <박학하였으니 이름을 낸 것이 없는>은 인문학자 공자의 삶의 태도를 칭송하는 글이다. 두루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공자는 어느 한 가지로 이름을 얻은 적이 없었다. 돈이면 돈, 권력이면 권력, 명예면 명예, 세간에서 중하게 여기는 무엇 하나에서 성공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비웃는 속인들에게 공자는 “나로 하여금 어느 일을 전문으로 잡아서 이름을 이루게 하려고 하는가? 그렇다면 나는 장차 말 모는 일을 잡겠다.”라고 말한다. 그 말을 세간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인문학자 본연의 자세에 충실하겠다는 다짐으로, 스스로에게 하는 말로, 필자는 해석한다. 위의 예시문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옛날의 전투에서는 말이 끄는 전차가 매우 큰 역할을 했다. 요즘의 기갑부대와 같은 존재였다. 그 전차에는 두 사람의 병사가 탑승했는데 한 사람은 말을 몰고 한 사람은 활을 쏘았다. 활 쏘는 이가 활을 잘 쏘게 하기 위해서는 숙달된 마부가 필수적이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전공(戰功)은 사수(射手)의 것이지만 사실은 ‘말 모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다. 공자는 인문학자의 그런 ‘보이지 않지만 소중한’ 역할을 강조한다. 

예시문에서 다루고 있는 화제가 ‘함축’에 관한 것이다. “말 모는 일을 잡겠다.”라는 공자의 말 자체가 ‘함축’ 일변도의 비유적 표현이다. 예시문은 그것의 ‘노는 의미’를 주로 인문학의 의의와 가치라는 쪽에서 포착한다. 그리고 공자의 인문학자적 자부심을 본받아서 자신의 삶도 그런 쪽에서 완성시키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내비치는 것으로 여운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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