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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12. 2019

빈대떡

나이 들면 흘리지 말아야 할 것

빈대떡


나이 들면 많아지는 것이 눈물, 콧물이다. 물론 또 있다. 고속도로 휴게실 남자 공중화장실에 적혀있는 “남자가 흘려야 하지 말 것은 눈물만이 아니지요”라는 표어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알 만한 남자는 다 안다. ‘흘리고 다니는’ 물이란,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또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젊으나 늙으나 조심해야 할 일이다(최근 방송 참조). 남아 대장부는 무릇 식색(食色)에 초연해야만 나중에 큰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야기가 좀 엇나갔다. 어쨌든, 나이 드니 눈물이 많아진다. 


얼마 전에는 아내와 함께 계산 성당 옆 골목에 있는 홍합밥집에서 빈대떡을 먹다가 목이 콱 메었다. 비릿한 돼지비계 냄새가 슬쩍 코끝을 자극하더니 한입 가득 녹두전 특유의 심심 쌉쌀 들큰한 맛이 구강(口腔)을 온통 도배하자마자 생각할 틈도 없이 누선(淚腺)이 요동쳤다. “그거는 맛없다”, 일전에 친구와 함께 와서 먹어봤다고, 수차 말리는 아내의 조언을 무시하고, "빈대떡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자는 진정한 어머니의 아들이 아니다"며 우격다짐으로 시켜낸 녹두지짐이었다. 맛이야 어떻든 무슨 상관이랴, 어머니와 둘이서 오순도순, “우리 조근놈(막내)이 다 컸다. 맷돌도 어쩜 이렇게 잘 돌리누”, 어머니는 가만가만 불린 녹두를 붓고 나는 씩씩하게 맷돌을 돌리고, 그렇게 모자간에 정담을 나누던 그 시절만 연상할 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사실, 그것 말고는 나로서 더 바랄 일이 없었다. 식당 어디서고 기대난망(期待難望), 어머니가 부쳐주던 그 녹두지짐만 한 맛을 무턱대고 바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미 지상의 맛으로는 더 이상 재현될 성질이 아니지 않느냐, 그런 식의 시건방진 자가분석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런데 아연 식신강림(食神降臨), 그날 제대로 복병을 만나고 말았다. 완연한 녹두지짐이었다. 어머니가 부쳐준 것 말고는 단연 최고였다. 그 심심하고 그윽한 녹두전의 맛, 내가 태어난 이남(以南)에서 먹어본 것 중에는 단연 으뜸이었다. 본 메뉴도 아니고, 사이드 메뉴인 주제에 사람을 이렇게 울리다니, 젓가락을 든 채로 순간 뜨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쪽을 보더니 아내가 얼른 한 마디 했다. “맛있나? 하기사 그때는 배도 좀 불렀었다....” 맛없다고 초를 친 것이 좀 미안했던 모양이었다. 40년 평생동지로서 서방의 일거수일투족을 꿰고 있는 아내는 그렇게 은근슬쩍 발뺌을 했다. 나도 엄연한 표정을 지으며, 별 일 없다는 투로, “제대로 부쳤네” 한 마디 하는 것으로 일단락 지었다. 더 이상 말문을 열고 있다가는 하릴없이 눈물 콧물 쏟는 누추한 꼴이 나올까 두려웠다. “그때는 와 그리 맛이 없었을꼬?” 아내가 크게 또 한입 뜯어가며 그렇게 또 이쪽을 위무했다. 팥밥과 녹두전, 그 둘은 아내가 본디 싫어하는 메뉴다. 근 40년을 함께 살면서 집에서는 한 번도 제대로 얻어먹어 본 적이 없다. 웬만하면 남편 사정도 좀 봐줄 만한데 자기 싫은 건 밥상 위에 절대 올리지 않는다(물론 예외가 있긴 하다. 하나 있는 아들 식성은 언제나 충분히 감안된다). 그래서 식단을 가운데 두고는 언제나 내겐 밉상이다. 그런 아내가 빈대떡을 그렇게 맛있게 먹어주니 표현은 안 했지만 내심 고마웠다. 자기도 3.8 따라지 평안도 출신 아버지의 딸이니...  


아침부터 빈대떡 생각이 고이는 연유를 모르겠다. 오랜만에 주말을 맞아 좀 느긋한 심정인가? 팥밥, 빈대떡, 왕만둣국, 냉면. 그런 것들이 가장 맛있는 음식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살아왔다. 중간에 다른 것들이 조금씩 끼어들기도 했지만 그닥 오래가지 못했다. 그중에서도 하나만 고르라면 나는 단연 녹두지짐, 빈대떡을 꼽는다(어머니는 꼭 녹두지짐이라고 불렀다). 정월 한 달 내내 먹던 만둣국도 맛있었지만 그건 그다음이다. 빈대떡이 네게 페티시즘인 것은 그것으로 어머니와 내가 함께 장사를 했던 이력도 한몫 거들기 때문이다. 어머니도 당신의 빈대떡 부치는 솜씨에 자부심을 느꼈던지, 아니면 어린 나이에도 팔뚝힘이 제법 있던 아들을 믿었던지, 아버지 가게 한 모퉁이에 화덕을 얹고 본격적으로 빈대떡을 부쳐 팔았다. 박리다매(薄利多賣) 문전성시(門前成市), 지글지글 돼지기름 타는 고소한 냄새로 온 동네를 발칵 뒤집어놓으며 어머니의 빈대떡은 날개 돋은 듯 팔려나갔다. 시쳇말로 대박이었다. 어디서 그렇게 손님들이 꼬이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어머니의 전대에 1원짜리 지폐가 가득가득 찼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 좌우로 왜식 적산가옥들이 검은 옷을 입은 미망인처럼 고개 숙여 도열한 그 음전한 거리에서, 장터도 아니면서, 요란한 소리와 냄새로 제대로 범벅을 짓는, 빈대떡을 지져 팔 생각을 하다니, 완전히 허를 찔린 풍경(風景)은 순간 완연하게 안절부절, 숨을 죽였다. 그러나 무언가 불안한 기운이 거리를 덮고 있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이 내게도 전달되었다. 결국 어머니의 모반은 사흘을 넘기지 못했다. 삼일천하(三日天下), 어머니는 그 거리 누군가의 고발로 건축법 위반인지 도로교통법 위반인지의 혐의로 즉심에 회부되고 말았다. 얼마 전에 생겨서, 거래선의 절반을 뚝 잘라 갔던 맞은편의 경쟁업체의 짓이라는 의심만 있었다. “조근놈은 나중에 꼭 판사가 되거라잉” 어머니는 젊은 판사에게 벌금을 맞고 나오면서 내게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길에 나앉아 있던 어머니의 화덕은 철거되고 어머니의 빈대떡은 더 이상 세상의 입맛들을 위로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아침부터 웬 빈대떡 타령인지 모르겠다. 늙으면 쪽팔림도 줄어드는 모양이다. <오래전 작성.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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