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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12. 2019

옛사랑이 돌아왔다, 야연

야연과 황후화

 옛사랑이 돌아왔다, 야연

      

인간은 부단히 새것을 만들어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것보다도 옛것을 물려받아 새롭게 손질하는 데 훨씬 능하다. 태양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 그런 말이 한때 많이 떠돌았다. 그러다 사라졌다. 그리고 저작권이라는 게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어디까지 모방이고 어디서부터 창작인가? 번안은 모방인가 창작인가? 오늘은 그런 물음을 던지게 만드는 두 영화를 살펴본다.

야연(夜宴)(풍소강, 2006)이라는 영화는 <햄릿>을 새롭게 손질한 영화다장쯔이와 다니엘 우가 멋지게 호흡을 맞추었던 인상적인 영화였다그와 비슷한 주제를 가졌던 황후화(皇后花)(장예모, 2007)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훨씬 짜임새가 있었고 보기에 좋았다화려하고 장대한 화면이 주는 미적인 감흥은 가히 막상막하(莫上莫下)둘 다 공히 여자의 남자’(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그 핵심적인 파블라(fabula, 사건의 연쇄)로 삼고 있는 영화였지만, <장쯔이/다니엘 우쪽이 <공리/주윤발쪽을 압도했다흥미를 끌기 위한 반전(反轉)이나 복선은 후자 쪽이 더 승()하였지만심리 묘사나 주제 친화적 여러 장치특히 가무(歌舞)를 동원해서 장면 장면, 극적 요소를 최대한 고양시킨 점은 전자가 훨씬 나았다어쩌면 단순히 주인공들이 젊은 쪽이 더 보기 좋았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주윤발보다는 다니엘 우가 멜로에 훨씬 더 잘 어울렸다우수가 그냥 흘러넘쳤다). 어차피 사람들은 감정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성을 동원한다고 하니까어쨌든기왕에 여자의 남자’ 모티프를 가져왔다면 원판(原版)에 충실한 편이 좋았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주제적 층위를 고려할 때남자 주인공을 부적(父的존재로 바꾸고 그를 최후의 승자로 살리는 것은 아무래도 모험이다(황후화). 오이디푸스는 오래된 환상이고 기대(期待)그런 것을 건드리는 것은 규범적 예술의 세계에서는 준비 없는 역모(逆謀)와 같다그래서 죽는다내가 볼 때 황후화(皇后花)는 공연한 억지를 부리다 죽은 영화다주인공을 바꾸고 또 살려서, "극의 여운을 빼앗아 가고 독자 참여의 몫을 많이 삭감했다."라는 정도로 책잡히고 말 정도로만 망한 영화는 아닌 것 같다.  

   

야연(夜宴)이 햄릿의 새로운 버전이라는 나름의 정체성이 있었던 반면 황후화(皇后花)는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서사구조를 표방한 것이 결정적으로  영화가 죽는 이유라고 앞에서 말했다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예술에는 규범적인 것이 있고 비규범적인 것이 있다옛날이야기들은 규범적(canonical) 예술양식에 속한다오이디푸스 신화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으로그리고 그것이 다시 셰익스피어의 햄릿으로햄릿이 다시 야연으로 내려앉는 것(displacement)’은 규범적 예술양식이 자신의 유전자를 보전하는 전통적인 방법이다인류의 오래된 환상이나 기대는 그렇게 유전(流轉)한다. ‘여자의 남자는 오이디푸스 신화의 유전자그것은 여러 가지 형태의 몸(숙주)을 옮겨 다니지만 결코 자신(의 정체성)을 바꾸거나 희생하지 않는다그럴 거면 그것이 아니다.

야연은 스핑크스의 실체(여자/어머니/황후/장쯔이)가 좀 더 분명하게극의 전개에 따라 점층적으로드러나는 서사구조를 지닌다거기에 비해 황후화(皇后花)는 스핑크스의 역할을 남자 주인공(남자/아버지/황제/주윤발)이 떠맡음으로써 일종의 유전자 변형을 꾀한다그러나그것은 비규범적 예술양식에 한해서 허용되는 것이다. ‘유전자 조작이 규범적 예술양식에서는 금기라는 것을 감독이 몰랐거나무시한 결과다그래서 영화가 죽었다. 

    

야연(夜宴)과 황후화(皇后花)를 해석의 관점에서 다시 비교해 볼 수도 있다오이디푸스 파블라(fabula)의 두 가지 핵심 요소즉 부친살해와 근친상간을 어떻게 보느냐가 해석의 관건이다그 이야기가 중심이고 나머지 이야기들은 그것을 드러내기 위한(혹은 감추기 위한부수적인 것들이라고 볼 때와반대로 희생제의의 설화적 정착이나 고대 역사의 설화적 윤색이 우선이고 오히려 그 두 가지 요소(부친살해와 근친상간)가 그 작업을 위해 그럴듯하게 작화된 요소(confabulation)’라고 볼 때는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양자 사이에는 엄청난 해석상의 거리가 존재하게 된다야연(夜宴)과 황후화(皇后花)의 거리가 곧 그것이다전자가 남자들이 모두 죽어야 하는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후자가 한 사람의 절대자(부권)를 옹립하는 스토리라인을 가지는 것도 모두 그 까닭이다다만이런 이야기의 해석이 영화가 주는 감동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부기해야겠다

     

이야기가 좀 전문적인 데로 흘러버렸다. 마지막으로 제목 이야기로 매듭을 지어야겠다야연(夜宴)은 그럴듯하다. 인생이 뭐 별 거 있겠는가한 바탕 꿈이거나아니면 밤에 벌이는 잔치지그런 게 제목에서 풍긴다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는 뉘앙스가 강하다그런 인생관에 걸맞은 서사의 진행도 제법 그럴듯하다. 그런데 황후화(皇后花)는 그런 게 없다제목과 줄거리가 따로 논다. <나는 공리다>로만 읽힌다그런데 이미 그녀는 여자가 아니다(권력으로만 보인다)당연히 꽃도 아니다야연(夜宴)에서는 장쯔이가 남자들의 여자에서 권력으로 이동할 때를 대비해서 여성성(女性性), 지배성을 띤 여성 원리 부분을 별도로 안배한다장쯔이보다 더 여성적인 여성이 등장한다더 젊고 더 가련하고 더 사랑에 맹목적인 연적(戀敵)이 등장하는 것이다그런 점에서 배려가 있다다만새 왕이 여자의 배신을 알고 스스로 죽음을 자청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설프다장쯔이가 죽는 것도 그렇고무엇이 그렇게 급했을까그냥 그 정도만 해도 될 것을그런 염이 든다어차피 오래된 환상이고 기댄데...  

    

사족 한 마디어느 조간신문에 크게 났다. 2040세대와 5060세대가 소통불능이란다마치 한 나라에 두 정부(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가 있는 것 같다는 말도 들린다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저의가 궁금하다주로 후자 쪽에서 그런 불통을 걱정하는 것 같은데 마치 아무런 반성도 없이어떤 류의 면죄부를 요구하는 말같이도 들려 아침부터 기분이 별로다세대 간 소통 부재에 대한 노파심은 어느 시대에서나 존재했다세대 간 불통은 고정관념이 깨어지는 과정이다그건 상식이다그것 말고도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언제나 불통은 존재한다내가 5060세대니 그쪽 사정만 간단히 요약한다지금 5060세대는 동일계 진학(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무시험 진학), 시험파(고교 전형이 있던 시절), 무시험파(고교평준화 세대), 운동권비운동권영남인호남인서울사람 시골사람있는 사람 없는 사람 등으로 갈기갈기 찢어진 세대다그때는 지금과 달리 그런 차이들이 유난하게 도드라졌던 때였다불과 두세 살 차이가 나면서도너나없이 가난했으면서도, ‘쟤들은 선후배 관념이 없고 우리라는 개념도 없다’, ‘쥐뿔도 없는 것들이(나이도 몇 살 안 많으면서) 가르치려고만 한다’, ‘영남 독식이다’, ‘지나친 피해의식이다’, ‘자기밖에 모른다’, ‘영웅심리다’, 등등의 불통 담론들이 횡행했다. 80년의 광주와 함께 성인이 된 아래 세대들이 보기에는 꼴통과 수구꼴통들의 도토리 키재기로 보일지 모르겠다그러나, 5060세대가 청년이던 시절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생존부터가 문제가 되던 때였다그래서 그들은 그 암흑기 시절 보이지 않던 출구를 향해자신의 생존을 걸고몸을 던진 이들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많은 이들이 그런 집단의식을 겉으로 잘 표현을 하지 않을 뿐이다레드콤플렉스를 뼛속 깊이 심어준 성장기 교육의 영향인지도 모르겠고너나없이 모두 고생하며 자랐다는 어떤 집단무의식이 그런 행동패턴을 조장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며칠 전 베이비부머 세대들의 몽니를 염려한다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 말속에는 일정 부분 반어적인 뉘앙스가 있다온 식구가 모여 앉아 내일 먹을 양식을 걱정하던 최악의 빈곤과 웬만한 중류층만 되면 자가용을 두 대씩도 가지게 된 풍요를 불과 한 세대 안에서 모두 경험하고 있는 5060세, 사상 초유의 명퇴 대상이 되어 바닥부터 다시 인생을 재구축하고 있는 5060세대들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개체들이 아니다산전수전 공중전 지하전 모두 다 겪었다그런 그들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인생에서 보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가 핵심이다)? 그 점을 무시하다가는 그 어떤 정치 세력도 앞날을 보장받지 못한다. 분명히 큰 코 다친다. 이 말을 믿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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