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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22. 2019

수레의 바퀴살이 벗겨지다

주역, 풍천소축, 장소애

수레의 바퀴살이 벗겨지다     

페이스북에서 반가운 단어를 하나 만났습니다. ‘장소애(topophilia)’라는 말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한 문학비평서에서 그 말을 보고는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던 일이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잠간 살 때의 일입니다. 한 직장에서 근무하던 부산 출신 동료가 저의 ‘장소애(topophilia)’를 지적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더 큰 범주 안으로 가져가는 것이었습니다. 대학 시절에도 나와 같은 친구를 본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대구 출신’들은 대구를 못 잊어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부산 출신들은 안 그런가?”, 그랬더니 “안 그렇다”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늙어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으나 자기는 서울이 좋다는 거였습니다. 그 친구는 ‘장소애(topophilia)’를 미숙한 자들의 전유물로 보는 듯했습니다. 그때는 그냥 그렇구나 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저의 장소애는 좀 병적인 데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려서 겪은 몇 번의 이산(離散) 체험이 그런 병적인 체질을 만들었을 것이라 지레짐작 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제 장소애가 큰 병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청주에 있는 직장에 근무할 때였습니다. 선임자 한 사람이 확실한 장소애를 보여주었습니다. 고향이 통영(당시는 충무)인 분인데 말끝마다 “토~영”을 마치 후렴구처럼 붙이는 거였습니다(통영 분들은 통영을 부르는 자기들만의 독특한 억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통영만큼 좋은 땅은 지상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물산이면 물산, 자연 환경이면 자연 환경, 인심이면 인심, 통영이야말로 그 모든 것의 최상치를 보유하고 있는 지상의 낙원이었습니다. 너무 그렇게 강조하니 다른 분들이 무슨 말을 하다가도 “통영은 물론 이것보다 훨씬 더 낫겠지?”라고 반문할 지경이었습니다. 저는 그 상황을 보면서 어릴 적 생각이 났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원치 않는 타향살이(피난살이)를 타박할 때마다 “우리 게서는(살던 데서는) 안 그랬는데”, “우리 게 먹을거리와는 너무 달라서”와 같은 말들을 곧잘 하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당신들의 장소애는 아마 훨씬 더했으리라 짐작합니다. 


어쨌든 장소애는 젊어서 저를 무척이나 곤란케 했던 신경증 중의 하나였습니다. 링반데룽(Ringwanderung, 등산에서, 짙은 안개 및 폭풍우를 만났을 때나 밤중에 방향 감각을 잃고 같은 지점을 계속 맴도는 일)이라고나 할까요? 아무리 벗어나고자 해도 결국 원점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간혹 이상 징후를 느낄 때도 있긴 합니다. 억지로 장소애의 대상을 옮겨보려는 충동이 들 때도 있습니다. 집필실을 마련한다는 핑계로 바닷가에 작은 거처를 마련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찻잔 속의 태풍입니다. 대상은 다르지만 장소애가 어떤 것인지 잘 그리고 있는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서른 다섯 늦은 나이에 서울에서는 완강히 닫혀있던 대학원의 문을 두드리기 위해 인천행을 결심하기 전까지 나는 골수 서울내기였다. 오래 살았다는 뜻만이 아니라 실제로 서울것 특유의 깍쟁이 기질, 문화적 스노비즘 등등에서 나는 누구에게 뒤질 것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울은 내게 온전한 '기억의 장소'였다. 동대문 밖 하급중산층 주거지 골목에서의 가난했지만 순수했던 유년의 기억, 고교시절의 광화문, 종로 일대 중심가에서의 문청 흉내로 우스꽝스러웠던 기억, 그리고 비록 관악산 구석이었지만 늘 그곳이 서울의, 대한민국의, 세계의 한복판이라고 여겼던 학생운동가로서의 오만했던 기억들...... 그리고 그 나날들을 관통했던 어설펐던 사랑들과, 격정과 고통으로 얼룩졌던 수많은 관계들이, 어느 길목을 돌아서도 훤히 알 수 있었던 지명들과 그 지명과 장소의 내력들과 거기 개인적으로 얽힌 기억들이 그렇듯이 애쓰지 않아도 하나의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그런 장소였던 것이다. 이른바 장소애(topophilia)도 사랑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 세월 동안 서울을 사랑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고, 그만큼 사랑하는 상대와 헤어지기 싫어했다는 게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김명인, 페이스북, 2015. 3.16)     


글자 몇 개만 바꾸면 저의 장소애(topophilia)와 거의 일치하는 설명입니다. 저는 젊어서 몇 번의 탈출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10대 말의 대학 입시나, 20대의 사관학교 교관 이력이나, 30대 초반의 국립대학 교수 부임 등의 기회에 ‘장소애’를 걷어찰 수 있는 호기(好機)를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 덕에 큰 아이는 한 열 번쯤 전학을 다녀야 했습니다. 그 과정은 참 무안하고 난처한 것들 일색이었습니다. 이른 시기에 저의 장소애를 지적했던 부산 출신 비평가 친구는 마지막 저의 귀소(낙향)를 두고 “어쩌면 행복한 병이다”라고 위로했습니다. 장소애의 원인은 ‘상처’(과거)와 ‘소외’(현재)인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어느 쪽이든 신경증인 것도 분명합니다.    

 

‘풍천소축(風天小畜)’, 주역의 아홉 번째 괘는 소축(小畜) 괘입니다. 밀운불우(密雲不雨), 군자의 덕이 베풂으로 아직 나아가기 전, 그 문채가 빛나는 시기를 뜻합니다. 구삼(九三)의 효를 설명하는 대목이 인상적입니다.  

   

구삼은 수레가 바퀴살이 벗겨지며 부부가 반목함이로다. (九三輿說輻 夫妻反目) - 상효가 힘껏 막고 있어서 끌고 갈 수 없으나, 이런 상황으로도 나아가므로 반드시 바퀴살이 벗겨진다. 자기(즉 구삼)는 양의 극이고 위는 음의 어른인데(상괘인 손괘는 맨 처음에 음효가 사귀어져서 이루어진 괘로, 가족관계로 말하면 첫째 딸인 장녀에 해당한다) 음의 어른에 막혀 스스로 회복할 수 없음을 부부가 반목하는 뜻에 견준 것이다.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101쪽]     


막힌 것들만 뚫고 가려다 ‘바퀴살이 벗겨지도록’ 고난을 자초했던 장소애의 한 평생이었습니다. 그럴 때는 부부간의 의가 상하기가 십상인데 그동안 묵묵히 가장의 결정에 순응해 온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그렇게 변덕을 부렸지만 한 번도 “싫다”라고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늘 “나는 어디든 다 좋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최근에는 “그때가 좋았다”라는 말도 가끔씩 합니다. ‘첫째 딸’인 큰 아이에게도 미안한 마음과 함께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구삼 설명에서 ‘첫째 딸’이 나오는 바람에 좀 놀랐습니다. 장소애에 빠진 아버지 아래에서도 잘 커 준 것, 그리고 가정을 이루어 제 몫을 다 하고 있는 것에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습니다. 몇 달 다니지도 못하고 다시 전학을 가야했던 ‘장소애의 상처’가 남아 있는 곳이 딸아이의 초임지가 되었습니다. 면접을 볼 때 “제가 다닌 초등학교가 바로 인근에 있습니다. 이곳이 마치 제2의 고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라고 말했다네요. 저는 ‘벗겨진 바퀴살’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만 집아이는 장소애 없이 어디서든 평탄한 일생을 보내길 바랄 뿐입니다.

<2015. 3. 22.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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