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사건을 기억하며
20세기 중반 그리스와 한국은 제국주의 침탈 이후 유사한 역사적 경로를 걸어왔다. 그리스는 독일의, 한국은 일본의 침탈을 경험했으며 이러한 경험은 해방 후
양 국가에서 정치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고 확대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냉전체제 형성기의 국가건설과정에서 촉발된
그리스 내전과 제주 4·3은 공간적, 내용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구조와 논리 속에서 민간인 학살을 야기한 사건이었다.
- 그리스와 제주, 비극의 역사와 그 후 (허호준)
2015년 2학기였나, 학교를 다닌 지 3년 만에 역사 수업이 생겼고, 평소 좋아하던 근현대사를 배울 수 있었다. 그리스 현대사를 접할 수 있었어서 아주 유익한 수업이었고 다음 학기에 또 들을 거다. 사실 공부를 열심히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스 근현대사에 접근했다는 것, 그리고 이 책을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수업이었다.
어마어마한 두께의 양장본이다. 그리스 올 때는 들고오지 못하고, 택배로 받았다. 교수님 말씀으로는 한국에서 이렇게 자세하게 그리스 근현대사에 대해 다룬 책은 없다고 한다. 학교에서 그리스와 한국의 역사가 비슷하다는 말을 계속 들으며 다녔기도 했고 근현대사를 좋아하는 나에게 이 책은 대학생활에서 얻은 최고의 책 탑 3 안에 들어간다. 저자 허호준 씨는 한겨레신문 기자님으로, 25년 동안 미국, 일본, 그리스, 제주도를 다니며 취재하고 자료를 발굴하셨다고 한다. 석박사는 저정도 공부해야 가능한가 라는 생각에 꿈이 더욱 멀어지는 소리...ㅎㅎㅎ 목차는 5장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제1장_ 그리스와 제주도는 왜 비극의 근·현대사를 품었나
제2장_ 그리스 내전
제3장_ 제주 4·3
제4장_ 그리스 내전과 제주 4·3의 비교: 일치점과 차이점
제5장_ 그리스 내전에서 제주 4·3을 보다
꼼꼼하게 완독을 하지는 못했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그리스 근현대사의 흐름이 어느 정도 잡힌다. 특히 5장에서 직접 그리스 답사를 오셔서 쓰신 부분은, 한국에서 읽었을 때와 그리스에서 읽었을 때의 느낌이 또 다르다. 내가 살던 동네가 나오는데, 매번 지나가던 곳에 이런 슬픈 역사가 담겨있는지도 몰랐다니. 한번 나중에 책과 함께 다시 찾아가 봐야겠다.
사실 그리스 역사하면 폴리스를 중심으로 한 고대 그리스 역사에 다들 초점을 맞추곤 한다. 가장 번영했던 기간이니 슬픈 그리스의 지배 역사는 잊히기 쉬운 것 같다. 한국의 세계사 책에는 동로마제국, 비잔틴 제국이 멸망했다고 쓰여 있으나 바로 그 동로마 제국이 그리스였다니.. 나는 동유럽 어딘가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리스는 오스만튀르크에 의해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이후 400년 가까이 터키의 지배를 받고, 독립을 하는 듯했으나 1941년부터 1944년 Κατοχή, 추축국인 독일의 점령을 받게 된다.
1944년 독일으로부터의 해방을 맞기는 하나 수많은 민간인들이 굶어 죽고, 살해당하고, 경제는 황폐화되었다. 결국 얼마 되지 않아 내전으로 이어져 그리스는 카오스 상태를 맞이한다. 거의 국가의 기반은 무너져버리고, 그리스는 힘 한번 써보지 못한 채 세계열강에 휘둘리게 된다.
지배역사가 없는 나라는 몇 없겠지만,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1910년 치욕스러운 한일합방 이후 36년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나라가 풍비박산이 난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며 광명을 찾은 듯했으나 일본의 지배 이후 자립성을 잃은 한국은 미국의 손에 넘어가고 만다.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독립을 맞은 동시에 신탁통치를 받게 되는 두 나라의 좌우 분열 대립은 첨예화되었다. 국민들 사이에서 테러가 동반된 폭력, 물리적 충돌로 번지게 되고 외세의 힘을 입은 정부군이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일까지 일어난다.
이 책의 1장에서는 그리스와 남한, 특히 제주도의 4·3 사건이 왜 닮아있는가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이 되어있다. 그리스 내전과 제주 4·3 사건은 닮은 점이 아주 많다.
1.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국, 소련의 대결구도를 상정하고 냉전 체제 형성기 미국의 개입이 있었던 것
2. 국가건설과정에서 '비 우익 그리스인/제주도민=공산주의자'라는 가정 아래 민간인에 대한 국가폭력이 일어났고 좌익에 의한 민간인 폭력도 심했다는 것
3. 외세의 지원을 받은 정부군 및 우익 무장단체와 저항세력의 '내전'이었다는 것.
Δεκεμβριανά, 데켐브리아나 라고 하는 12월 사건은 1944년 세계 2차 대전 중, 대영 제국의 지원을 받은 극우 정부와 공산주의 세력이 충돌한 사건이다. 사실 이 당시에는 EAM-ELAS라고 하는 공산주의 세력이 그리스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을 때였다. 12월 3일, 20만 명의 시민들이 파네피스티미오를 지나 의회가 있는 신다그마까지 시위를 펼쳤다. 이는 즉시 영국의 탱크와 함께 경찰에게 진압되었고, 장비 하나 갖추고 있지 않던 시위 참가자 28명이 사망하고 148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아테네 전역에 자극제가 되어, 37일 동안 대규모의 시위와 투쟁이 일어난다.
데켐브리아나 사건도 지나고, 해방을 맞아 미군이 한국을 점령하고 있던 1947년 4월, 삼일절 기념행사에서 경찰의 발포로 6명의 주민이 사망하고, 무고한 주민들이 체포된다. 이에 제주도민들의 봉기가 이어졌지만 미군과 정부는 이들에게 공산주의자라는 탈을 씌워 학살시킨다. 학살을 피해 동굴로 숨어든 주민들을 죽이기 위해 동굴의 입구를 막고 불을 지르는 등 악랄한 행위를 일삼으며 제주도민의 1/9에 달하는 인원이 사망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사실 제주도뿐만 4·3 사건뿐만 아니라 독립 이후 민주주의 공화국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독재자들이 등장하고, 국민들의 민주화운동 전개 방식 등 비슷한 점이 많다. 가끔 지금 현재 한국 상황에 대해 물어보는 그리스인들이 있다. 지금의 대통령은 탄핵이 되었고, 독재정치를 했던 대통령의 딸이라는 설명을 하면서 그를 Γεώργιος Παπαδόπουλος, 요르고스 파파도풀로스와 같은 사람이었다고 설명해주면 다들 바로 아하! 하면서 한 번에 알아듣는다. 비슷한 역사를 가진 두 국가라 이런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군사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했던 두 나라의 지도자 박정희, 요르고스 파파도풀로스.
그래도 파파도풀로스가 더 착해 보이는 건 나의 착각일까. 독재라 해봤자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기간의 1/3인 6년밖에 되지 않던데... 업로드하기도 기분 나쁜 사진
그리스와 한국 사이에서 언어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역사를 이해하고 기억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길이 남을 위인들도 있고, 수많은 발명품과 아름다운 이야기들도 있지만 슬픈 역사를 기억하는 것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감수성이 풍부했던 사이프러스 계 그리스인 친구와 역사 얘기를 하다 친구가 운 적이 있다. 그리스도 한국도 아픈 역사가 있고,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서로의 슬픔에 공감을 해 줄 수 있었던 것 같다. 기쁜 식사자리였는데 갑자기 울음바다가 되었던 순간.
그리스 사람들은 내전에 대해 얘기를 잘 꺼내지 않는다고 한다. 극심한 좌우대립을 겪으며 서로 죽고 죽이는, '내전'이라는 단어로 한정시키기 어려울 만큼 심각한 전쟁을 겪었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운 내전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한국 전쟁에 참전을 지원했을 정도라고.. 사실 서로를 죽이고, 고발하고, 의심하던 민족의 분열이 한국이라고 없었을까. 너무나도 멀리 있는 국가지만 어떻게 이렇게 비슷할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비단 우리나라만 아프고 슬픈 역사를 가진 것이 아니다. 이런 역사를 나누며 이해하고, 동질감을 느끼는 그 순간에는 국적을 불문하고 다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들과 같이 슬퍼하고 공감하기 위해서라면 하나라도 더 많이 배우고, 느껴야겠다고 생각을 하는 오늘이다.
무고한 제주도 4.3 사건 희생자와 그리스 내전 피해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Να αναπαύθουν οι ψυχές των θύματων του Εμφύλιου Πόλεμου και της εξέγερσης του Ζέζου 4.3 εν ειρήν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