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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xou May 01. 2017

5월 1일, 저항의 물결이 형장의 이슬로

그리스 케사리아니 처형장 - 레지스탕스의 슬픈 역사

<그리스와 제주, 비극의 역사와 그 후>를 읽던 와중에, '케사리아니'라는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나 다를까 책 마지막 장은 직접 그리스 답사를 오셔서 쓰신 내용이었는데 내가 살던 이웃 동네가 나오는 것이었다!! 심지어 가끔 학교에 걸어갈 때에 지나던 곳이었다. 왜 이제야 알았을까...

내가 살던 곳은 Βύρωνας, 비로나스이고 지도 오른쪽 위에 아테네대학교가 있다. 집에서 한 20분 정도 걸어가면 정문에서 교내 안으로 들어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는데, 워낙 걷는 것을 싫어해서 매번 그냥 뺑뺑 돌아서라도 버스를 타고 가고 그랬다. 가끔 걸어갈 때마다 지나던 Άλσος Σκοπευτήριου(Alsos Skopeftiriou). 그냥 숲이라고 하긴 애매한 공원이었는데, 그리스는 공원이라고 해봤자 잘 조성이 되어있지 않고 으슥하기까지 해서 일부러 피해 간 적도 있었다.

비로나스에 잠깐 들러 볼일을 보고 걸어가 보기로 했다. 달콤한 향기가 난다 했더니 오렌지 꽃이 만개했다. 오렌지 꽃은 왠지 상큼한 향이 날 것 같지만, 정말 꿀 떨어지는 달콤함이다. 진짜 봄이 온 것 같은 기분에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공원..? 앞 도착. Θυσιαστήριο της Λευτερίας. Altar of Freedom... 자유의 제단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1940년대 그리스인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총살했던 이곳을 기리기 위한 이름일까 생각했다. 사진으로는 별로 안 그래 보이지만 꽤 음침한 곳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안에는 어린이 놀이시설이 있는지, 오른쪽에 영업 안내 문구가 쓰여있었다.

으으 비둘기 천국이었다. 냄새도 좀 많이 났다. 무서워서 뛰어갔다.

포켓몬 고를 하면서 뛰어가다 보니 그래도 이런 공원이 나왔다. 사실 여기는 포켓몬 고 덕분에 찾아올 수 있었다... 물어물어 찾아오긴 했겠지만,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그냥 무턱대고 출발한 거였기 때문에...

포켓몬 고의 순기능: 길을 찾을 수 있다


할머니 두 분이 닫힌 철문 사이로 추모비를 보고 계셨다.

철문 사이로 렌즈를 들이밀어 겨우 찍어보았다.

안경을 왜 안 가져왔을까.. 대충 보니 연도와 이름이 쓰여있었다. 사람도 찾지 않고, 문도 굳게 닫혀 있는 적막한 이곳에서 참혹한 그 순간을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원래는 가운데에 물이 흐르고, 붉은 조명이 비춘다고 하는데 들어가 볼 수 없어 아쉬웠다. 흐르는 붉은 피를 형상화한 것일까.


1944년 봄, 독일을 포함한 추축국의 지배를 받던 당시 그리스 국민들의 저항은 점점 심해졌다. 마을, 도시 단위로 레지스탕스가 편성되어 각지에서 시위가 일어나고 독일군들이 피해를 입었다. 어떻게 해야 이들을 효과적으로 진압할 수 있을지 고민을 하던 독일군들이 건수를 잡았다. 4월 27일, 그리스 인민 해방군들은 라코니아의 라이라는 곳에서 독일 장군 프란츠 크렉을 포함한 호위병들을 사살했다. 이에 따라 나치에 협력하고 있던 대령 디오니소스 파파도고나스의 지휘 하에 펠로폰네소스 대대는 그 지역에 있던 레지스탕스 100명을 체포하여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당시 카티메리니(그리스 일간지)에 그리스 사령관의 입장 발표문이 실린 내용이다.

<알림>
1944년 4월 27일, 몰라이에서 매복하고 있던 공산주의자 집단이 독일 장군과 세명의 호위병을 사살하였다. 이에 따른 보복은 아래와 같다.


1) 1944년 5월 1일 공산주의자 200명에 대한 총살형에 처함.
2) 몰라이에서 스파르타로의 길목에서 독일군과 마주치는 모든 남자들을 총살형에 처함.


이 중죄에 따른 결과로, 그리스인들은 자발적으로 다른 공산주의자 100명을 살해하였다.


그리스 사령관


사실 이것은 현대 그리스어가 아닌 카타레부사로 쓰여있어 해석이 조금 어렵다.... '자원한 그리스인'들은 정말로 자원한 그리스인들이 아니라 펠로폰네소스의 대대 소속 군인들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친독파, 혹은 명령에 따른 사람들일 것이다.

공산주의자라는 죄목으로 끌려온 200명 중 170명은 Ακροναυπλία, '아크로나프플리아'라는 감옥의 수감자나 Ανάφη, '아나피'라는 섬으로 추방당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메탁사스 독재정권부터 자유를 위해 투쟁하다 수감된 좌파 국가 자유전선 EAM 혹은 그리스 공산당 KKE 단원들이었다.

Αδέλφια, γεια σας!
Ζήτω το ΚΚΕ!
Ζήτω το ΕΑΜ!
Ζήτω η Ελλάδα!
Εκδίκηση! Λευτεριά!

형제들이여 안녕!
KKE, EAM, 그리스는 영원하라!
복수한다! 자유여!


아테네 Χαϊδάρι, '하이다리'에서 케사리아니 총살장으로 가는 길목에는 수감자들이 던진 옷가지와 유언뿐만 아니라 용기, 자존심, 저항과 복수의 외침으로 가득 찼다.

Καλύτερα να πεθαίνει κανείς στον αγώνα για τη λευτεριά,
παρά να ζει σκλάβος
- Νίκος Μαριακάκης , Γεωπόνος

노예로 사느니, 자유를 위해 투쟁하다 죽겠다
- 니코스 마리아카키스, 크레테 농학자

Πρωτομαγιά. Γεια σας όλοι, πάμε για μάχη
- Κώστας Τσίρκας

메이데이, 모두들 안녕. 싸우러 가자
- 코스타스 치르카스


사진으로 남은 것은 이외에도 수많은 편지들이 발견되었다. 이 중 나의 눈을 끌었던 것은 열네 살 Ανδρέας Λυκουρίνος, 안드레아스 리쿠리노스. 열네 살이라니. 한국 나이라고 해봤자 열여섯..

Μπαμπά.
Με πάνε για εκτέλεση στην Καισαριανή,
μαζί με άλλους εφτά κρατούμενους.
 Ειδοποίησε σε παρακαλώ πολύ τα σπίτια τους!
Μη λυπάσαι. Πεθαίνω για τη λευτεριά και την πατρίδα.
Αντρέας

아빠, 케사리아니의 처형장으로 가고 있어요.
다른 일곱 명의 수감자들과 함께예요. (이름 나열)
그들의 가족, 집에게도 전해주세요.
슬퍼하지 마세요. 조국과 자유를 위해 죽습니다.
안드레아스

그의 메모는 4개월이 지난 9월 중 어느 날 아테네의 길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독일 점령기 이후 Θέμο Κορνάρο, 테모 코르나로가 쓴 잡지 «Ελεύθερα Γράμματα, 자유의 편지»에 기록되었다. 1학년이었던 그는 학교 수업과 조국을 위한 투쟁 사이에서 일말의 고민도 없이 조국을 선택했다. 사실 극심한 기근도 한몫했을 것이다. 가난한 목수의 집에서 자란 그는 가정을 책임져야 했고,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위해 싸우고 승리해야겠다는 열망을 가졌다. 12살이었던 그는 레지스탕스에서 일하고, 독일군에게 끌려가 고문까지 이겨냈지만 처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마지막 유언이었던 그들의 편지를 읽으며 계속 울었다. 사무실인데. 한 문장, 문장을 읽어 내려갈 때마다 눈물이 벅차올라 화장실로 뛰어가야만 했다. 대체 어떻게 된 세상이 열네 살의 아이를 전쟁터로 몰고 간 것인지. 17살, 19살, 22살 어린 학생들도 있고 국회의원도 있고 각자 출신지도 다양하다. 그 누구도 두려움의 기색은 없다. 끝까지 그리스의 자유를 위해 외치고 있고, 남은 가족과 친구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무거웠을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독일군이 방아쇠를 당기는 그 순간까지도 남아있는 자들은 그리스는 곧 승리할 것이며 독일은 무너질 것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담이 높았다. 키가 작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까치발을 서도 잘 보이지 않았다. 폴짝 뛰면서 본 그곳은 바로 처형장이었다. 한 번에 보아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수많은 그래피티로 가득한 이 벽에 수많은 호국영령의 한이 서려있는 것 같았다. 높게 자라 있는 나무들마저 얄미웠다.

저 멀리 작게 보이는 돌 위에 추모의 문구가 쓰여있다. 들어가 볼 수 없음에 아쉬웠다.

2015년 1월 25일,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급진 좌파 연합당 '시리자'가 총선에서 승리하여 Αλέξης Τσίπρας,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총리가 되었다. 그는 취임식을 마치자마자 붉은 장미를 들고 이곳을 방문했다. 그리스에게 구제금융을 제공하고 잔혹한 긴축을 요구하는 독일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저항의 지를 보여주고자 함이었을까.

영웅들과, 그들의 목격자들과 레지스탕스들을 위해. 1942-1944

독일군의 총알에 쓰러진 그들 위로 케사리아니 시민들도 묵념을 하며 꽃을 뿌렸다. 그들의 위대함에 모두 고개 숙여 조의를 표했다. 다음 날, 케사리아니의 사람들은 독일군의 테러를 경멸하며, 피로 가득 찬 거리의 이름을 'Όδος Ηρώων Σκοπευτηρίου', '스코페브티리오 영웅의 길'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이 길은 영웅의 길이다.
5월 1일 200명의 용감한 그들이 걸은 길.

이 사건 이후 독일에 대한 그리스인의 반감은 더욱 거세졌다. 바로 다음 날, 하이다리 수감소에 다섯 명의 여성 운동가가 끌려온다. 독일군이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여성에게 강제집행을 진행한 날이었다. 그들은 수많은 위협, 수감, 고문에도 불구하고 항복하지 않았다. 총살장으로 끌고 가겠다는 마지막 위협에 대한 그들의 답변은 간단했다.

Δεν φοβόμαστε τον θάνατο.
Μόνο οι προδότες σαν και σένα τον φοβούνται!
죽음 따윈 두렵지 않다.
당신 같은 반역자들이나 무서워하겠지!

결국 5월 3일, 200명 순국선열의 피가 채 마르지도 않은 스포페브티리오에 여성 운동가 다섯 명과 그들의 가족 수십 명이 끌려온다.  48일 동안, 케사리아니의 총살장에선 600명이 넘는 레지스탕스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희생되었다. 케사리아니 주민들은 매일 아침 이 끔찍한 살육을 지켜보아야 했고 아테네 시의 쓰레기차들은 공동묘지로 시체를 퍼 날랐다.  


한참을 앉아있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핸드폰을 보면서 펑펑 울고 있는 동양인이 이상해 보였는지 지나가는 사람마다 계속 나를 쳐다봤다.

70년 조금 넘은 스코페프티리오의 역사는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그마저도 잊혔겠지. 스코페프티리오는 높은 벽에 가려져 있었고, 맞은편의 공원은 너무나도 한적하고 평화로웠다. 살육의 현장이었을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한 시간가량 앉아있다가 약속이 있어 발길을 나섰다.


아무 생각 없이 다시 포켓몬 고를 하면서 걷고 있다 발견했다. 심지어 저게 풀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도 않다가 겨우 찾은 거였다.

자세히 찍고 싶었는데 벤치에 걸려 더 가까이 볼 수 없게 되어있었다. 그럴 거면 왜 저기에 설치해둔 거야... 포켓몬 고 아니었으면 발견도 못했을 거다... 1944년 7월 조국의 자유를 위해 싸운 사람을 추모하는 문구였다.

공원을 지나, Λεωρόρος Εθνικής Αντιστάσεως, 굳이 번역하자면 '저항운동의 길'정도가 되겠다. 교회와 광장 사이의 길이다. 아무튼 이 길을 지나면 보이는 광장이다. 광장은 카페와 타베르나로 가득 차있었다.

광장 구석엔 케사리아니에서 싸운 레지스탕스 저항운동가들을 기리는 기념 조각상이 있지만, 누가 말해주지 않으면 모를 만큼 지나치기 쉽다.

바로 옆 돌 위에도 레지스탕스를 기리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1944년 9월 23일 조국의 자유를 위해 싸운 키리아코스 여기에 쓰러지다

저 돌들은 잘 보이는 길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세히 보면 눈치채지 못할 만큼 꽁꽁 숨겨져 있었다. 근처에 나무나 벤치가 가려져 있었는데 포켓몬 고 덕분에 발견을 하게 된 것... 참 아이러니하다.


케사리아니는 이렇게, 독일에 대항한 레지스탕스의 아픈 역사가 서려있는 곳이다. 바로 옆에 살면서도 알지 못했던 내가 바보 같기도 하고, 이제야 알게 되어 다행이기도 하다. 앞으로 차근차근 그리스의 역사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와도 비교하면서 공부해야겠다. 한국어로 된 책만 겨우 읽어냈지만, 영어나 그리스어로 된 역사책은 언제쯤 읽게 될 수 있을까? 그래도 내가 이 책을 제대로 정독하게 된 이 시점에 그리스에 있다는 것이 정말 행운이다. 책으로 배운 내용을 언제든지 직접 답사로 떠나볼 수 있으니까. 고대하던 내 꿈인데!! 앞으로 이런 삶을 계속 살 수 있을까? 그리스에 돌아올 수 있을까? 아직 그리스인데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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