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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캉가루 Oct 11. 2021

여의도 직장인의 배고팠던 시절

캐나다 물가라고 무조건 저렴한건 아니라구요!




내가 캐나다에 있었던 2018년, 캐나다 환율은 1달러에 830~880원 사이를 바쁘게 왔다갔다했다. 지금은 조금 올라 900원대 중반을 웃돌고 있지만 유로화(EUR)나 파운드화(GBP), 미국달러(USD)와 비교하면 캐나다 달러(CAD)는 눈에 띄게 낮다. 물가가 낮은 편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낮은 환율 덕에 캐나다에서 구매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물건들은 한국보다 10~20%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었다.



그러나 딱 한가지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외.식.비.!



서울에서도 물가 비싸기로 유명한 여의도의 메카 '진주집'의 닭칼국수가 10,000원인데, 캐나다에서는 10,000원 이하의 식사 메뉴를 찾기 힘들었다. 간단히 팀 홀튼(Tim Hortons)에서 도넛과 커피로 때울수야 있었지만 이렇게 먹는 것도 한 두번이지, 주린 배를 부여잡고 다니려고 8600km를 날아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휘황찬란했던 점심메뉴들 (한국보다 1.5배 비쌈 주의)




캐나다에서의 첫 2개월 동안은 한끼에 20,000원에 육박하는 음식들을 사먹으며 다녔다. 게다가 친구들과의 주기적인 파티, 작별식사 등의 밍글링, 한 달에 두세번씩 코리안 레스토랑에서 치킨과 소주를 적신 것(한국 식당에서는 소주 한 병에 대략 16,000원 정도)까지 합하니 한 달 생활비의 80% 이상이 외식비로 나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난 일개 대학교 3학년 휴학생이고, 한국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꼬박꼬박 보내주는 돈 없이는 살 수 없는 미물에 불과하다는 걸.


현자타임 비슷한 걸 느끼고, 한 달 가까이 집에서 도시락을 싸서 점심을 해결했다. 인간의 혀가 참 간사한게, 15달러짜리 쌀국수, 피자, 포케, 파스타, 스시 같은 것들을 매일매일 먹다가 나의 남루한 음식솜씨로 만든 토스트나 샐러드를 먹으려니 목구멍에서 잘 넘어가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계속 외식만 하면 MSG 맛에 질려버리곤 했는데, 왜 캐나다 식당 음식들은 몇 달 째 먹어도 질리지가 않았던 걸까? 그리고 무엇보다 식비를 아낀다고 친구들의 모임 초대를 거절하는 것도 미안했다. 앞으로 캐나다에서 남은 나날들을 이렇게 보내는게 맞는걸까?




나만의 은밀한 고민거리였던 식비 문제는 의외의 곳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학원에서 각자의 고민거리를 쓰고, 무작위로 돌려 어드바이스를 적어주는 활동이 있었는데, 난 당연히 식비 문제를 적어 냈다. 닉네임 'Sausage dog'인 친구가 답변을 작성해줬다.



내 식비 고민에 대한 Sausage dog의 정성스런 답변



Sausage dog의 답변을 대충 번역해보면 이렇다.




지영에게.

친구야, 너가 쓴 내용 잘 읽었어. 나도 여기 캐나다에 영어를 공부하러 온 것이기에 지금 너의 심정을 나도 이해해. 너의 고민에 명확한 답을 내려주기는 어렵지만, 네가 요즘 점심을 만들어오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어. 여기 캐나다에 머무르는 목적은 너의 나라에서 하지 못하는 것들을 경험하고 공부하기 위함이잖아. 가능한 한 자주 너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 해. 그런데 너가 돈이 완전히 바닥난게 아닌 이상 전세계에서 온 친구들과 점심을 즐기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친구들과의 식사는 먼 훗날 돌아봤을 때 너에게 잊지 못할 추억이 될거야.

Sausage dog으로부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맞다, 이곳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은 이곳에서 만난 친구들과 최대한 많은 추억을 쌓는 것이었다. 각자의 나라에 돌아가면 다시 볼 수 있는 날을 기약할 수 없는 친구들이기에 이곳에서 함께 보내는 시간 하나하나가 소중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알바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돈 걱정과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은 잠시 내려두고, 먹고 싶은 음식들을 마음껏 먹으며 캐나다에서의 남은 나날들을 보냈다.






3년 후, 나는 한국 직장인 밀집지역 중에서도 물가가 높다는 여의도에서 직장을 다니게 되었다. 직장인이 되어 그때보다 주머니 사정도 훨씬 넉넉해졌지만, 15,000원이 넘어가는 점심을 먹을 때면 가끔씩 그 시절 식비 때문에 고민했던 내가 떠오른다.


누구나 그 시기에, 그 곳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이 있다. 똑같은 피자 한 조각을 먹더라도 한국에서 먹는 것과 캐나다에 먹는 것은 분명 기억의 강도와 지속시간이 다른 것처럼 시간이 많이 흘러 지금 이 순간을 돌아봤을 때, 루틴이 되어버린 모든 일상들도 특별한 점들이 되어있지 않을까? 그 과정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고민들이라면 치열하게 맞서되, 그 고민들에 파묻혀버리진 말아야겠다. 워크 하드! 플레이 하드!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덧붙이자면, 내 고민에 답을 준 Sausage dog는 사실 내가 몰래 좋아하고 있던 일본인 친구였다. 내가 이 글을 몇번이나 읽은 것도, 고민을 빨리 끝낼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이 친구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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