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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캉가루 Sep 17. 2024

정시퇴근해도 집에 가면 8시 30분

일주일에 15시간을 이동에 쏟는 경기도인의 삶

통학시간, 통원시간, 통근시간 = 1시간 + a


어렸을 적부터 나는 학교도, 학원도, 직장도 집과 가까워본 적이 없다.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녔지만 학교와 정반대 지점에 있는 곳에 살았고, 학원은 먼 곳만 골라 다닌 탓에 늘 통원버스를 이용했다. 성인이 되고나서부터는 통학시간이 기본 1시간으로 늘어나더니, 휴학하고 떠난 캐나다 어학연수에서조차 그 많은 외국인 친구들을 제치고 내가 우리 학원에서 가장 통학시간이 가장 긴 사람이 되어있었다. 지금 다니는 회사는 지하철로만 환승 2번을 해야 한다. 이쯤 되면 이동하고 또 이동하는 게 내 운명인가? 내 사주에 역마살이 진하게 끼어있나 하고 확인을 해봤지만 역마살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이래...?


캐나다에서 학원 다니던 시절. 왕복 2시간 통학길이었지만 버스타고 지나던 해안도로 덕에 버틸 수 있었다!



학생 때까지는 당연한 거겠거니 하고 지냈지만 이런 내 삶에 대해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 건 직장인이 되고 나서부터였다.


퇴근하고 집 오면 8시, 이게 맞나요?
8시~9시에 집 가면 운동이나 공부는 어떻게 해요?



직장인 커뮤니티에 위와 같은 제목의 글들이 하나 둘 눈에 띄기 시작했다. 나는 7시에 정시퇴근 한다는 가정 하에 집에 오면 아무리 빨라도 8시 30분인데, 운동도 하고 공부해서 자격증도 따고, 심지어 연애까지 했다. 다들 이렇게 사는 게 아니었나..? 내가 어부지리로 갓생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하루에 왕복 3시간을 이동시간에 씀으로써 내가 손해 보고 있는 가치들에 대해서 처음으로 생각해 보았다.



지하철에서 무의미하게 버려지는

시간과 체력

출퇴근길 지하철이 특히 경기도인에게 더 지옥인 이유는 단순 이동시간이 길어서만은 아니다. 밀도 높은 지하철에 끼어가면서도 지금 있는 곳보다 더 편한 자리를 매의 눈으로 스캔하는 감각을 유지하면서 앞사람, 옆사람과의 은근한 팔싸움을 통해 스마트폰을 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을 부단히 해야 한다. 매일매일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의식을 치러야 회사(or 집)에 겨우 도착하는데, 텍스트만 봐도 느끼셨다시피 꽤나 엄청난 정신력과 체력을 소모하게 된다.


+ 지하철 환승통로 내 단거리 마라톤

열차가 곧 도착함을 알리는 웅장한 멜로디가 이어폰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오면 보고 있던 유튜브 영상도 내팽개치고 아주 빠르게 뛰어서 스크린도어 앞까지 도착해야 한다. 그래도 이건 서울교통공사가 내 멱살을 잡고 유산소 운동을 시켜주는 것이라고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그리 힘들다고 생각이 들진 않았지만 열차 도착 멜로디는 조금만 더 잔잔한 걸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지금의 멜로디는 괜히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점점 잦아지는 운동수업 결석

집 근처에 있는 요가원에 다니면서 수업에 결석하는 일이 쉬워졌다. 퇴근하면 무조건 집으로 향해야 하는 집순이인 나는 회사가 아닌 집 근처에 있는 요가원에 다닌다. 요가나 필라테스 수업 특성상 미리 짜인 월간 시간표가 있고, 하루의 마지막 수업은 보통 9시에 시작한다. 그 말인즉슨 야근을 30분이라도 하게 되면 그날은 요가 수업을 들을 수 없다는 것. 야근이 잦은 달에는 거의 그 달의 회원권을 날리다시피 한 적도 있다. 하루의 끝에 기다리는 요가수업만을 기다리며 달려왔는데, 퇴근길 환승역에 도착해서 엄청난 줄을 보고 열차 몇 대를 보내면서 눈물을 머금고 예약된 수업을 취소했던 적도 정말 많다. 이런 날은 정말이지 너무 억울해서 집에서 더욱 격렬하게 유튜브 선생님을 따라 하며 요가를 한다.


지난 달에는 아예 요가원에 가지 못했다.


위에 언급한 일들은 쌓이고 쌓이다가 주로 일이 힘든 날에 한꺼번에 터진다. 야근하고 집에 가는 길에 너무 서러운 나머지 내일 당장 서울에 집 알아보러 간다는 다짐을 수도 없이 했다. 그렇지만 실상은 부동산 앱만 뒤적거릴 뿐 한 번도 직접 발품을 팔러 가본 적은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 화에서 말씀해 드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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