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성이라는 이름으로 폄하당하는 노동에 대하여
대기업 직장인으로서 11년째 살고 있다.
끝없는 경쟁, 높은 업무 강도, 주주의 이익을 최우선 한다는 '주식회사'라는 이름의 불공정 배분, 이 와중에 고용 안정성까지 보장되지 않는 일반 회사 직장인으로서 나는,
솔직히,
공무원이
부럽지 않다.
2019년 최연소 7급 공무원 사망 소식에 공무원 사회에 대한 의견이 갈리는 것이 보인다.
- 평생 안정적인 철밥통 직장을 가졌는데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생을 마감하냐
- 갑갑한 조직문화와 직장 내 괴롭힘, 과중한 업무, 각종 사회 부조리를 갓 스무 살 넘은 친구가 겪으며 얼마나 힘들었겠느냐
나는 90년대 후반 IMF사태를 초등학생 때 맞이한 세대다. IMF를 기점으로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면서 안정적인 직장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졌다. IMF가 터졌을 때 뭘 잘 모르던 초등학생이었던 내 또래 친구들은 그렇게 뭘 잘 모르는 상태에서 공무원이 최고다 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 실제로 많이들 공무원(또는 공기업 직원)이 되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공무원의 삶은 고달프다(고 한다).
1. 일단 박봉이다.
: 기본급만 치면 최저임금도 안된다고 한다. 물론 개인별로 수당의 정도가 달라지므로 정확하게 얼마를 받는지 알 수는 없지만, 9급 1호봉 기준으로 수당까지 합치면 최저임금을 약간 넘는 수준이라고 알려져 있다.
2. 일의 강도가 생각보다 낮지 않다.
: 이것도 개인마다 하는 일에 따라 다르지만, 어쨌든 공무원은 국가나 지자체가 해야 할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므로 각종 규정과 법을 꿰고 있어야 하고, 개정될 때마다 내용과 절차를 업데이트해야 한다. 좀 과한 케이스이긴 하지만, 이번 정부 들어서 부동산 관련 세금이 어마 무시하게 바뀌어 세무사도 양도세 상담을 포기하는 판에, 이걸 처리해야 하는 세무공무원들의 고충은 어마 무시할 것이다.
작년에 국토부에서 어느 날 갑자기 서프라이즈로 그날 이후 아파트 민간임대주택 제도를 폐지하겠다고 했을 때 우연히 구청 주택과를 들르게 될 일이 있었다. 제도 폐지 직전 임대주택 등록을 위해 주택과 앞 복도에는 발을 동동 구르는 민원인들로 한가득이었고 아마도 그날로부터 민원처리 기한까지 그 담당 공무원은.......... 대부분의 민원의 경우 처리기한이 정해져 있어 접수되는 순간부터 납기 시계가 째깍거리기 시작한다. 공무원들은 정말로 자기가 휴가 쓰고 싶을 때 쓸 수 있을까?
3. 주 업무 외에도 해야 하는 일이 많다.
: 공무원은 국가나 지역에 고용된 사람이므로 뭔 일이 생기면 바로 동원된다. 눈이 너무 많이 왔을 때나 선거 때, 그리고 코로나 같은 전염병으로 인해 초기 대응인력이 필요할 때 누가 시민들을 상대해주고 불편을 해결해주었는가.
공무원은 '어떤 업무'만 특정하여 근로계약을 한 것이 아니므로 국가가 필요로 할 때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은 맞다. 그렇지만 때때로 과도한 공무원 동원으로 인해 갈등을 빚어내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5급 이상 고급공무원 아니고서야) 사회에서 딱히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자니 주변에서 다들 말리고 스스로도 이만한 직장 없지라고 다독이며 다니는데 결국 그만두지 않는 이상 돌파구가 없다.
실제로 대기업을 10여 년간 다니며 만나본 공무원들의 삶은 그렇게 편하고 좋아 보이지만은 않았다. 건설회사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주택과, 건축과 같은 부서의 담당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이쪽 부서 일 특성이 이런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대부분 자기 편의만 생각하며 일을 하지도 않았고, 또 업무에 필요한 지식을 쌓느라 고생을 하기도 했다.
입사 2년 차 때 일이다.
회사동기가 약정한 공사기간의 마지막 날, 준공 허가증을 받기 위해 저녁 8시가 넘도록 구청 주차장에 차 대놓고 대기 타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입사 2년 차 때이다 보니 공무원에 대한 환상 같은 게 있어서 '과연 공무원이 퇴근시간 지났는데 처리해줄까?' 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담당공무원 및 팀장이 야근을 불사하며 처리해준 덕분에 그 날 사용승인서(준공허가증)가 나왔다. 사실 건설회사가 공사기간을 못 맞춰서 망하든 말든 담당 공무원이 알 바 아닌데도 말이다.
이번엔 입사 3년 차 때 일이다.
그 당시 도시및주거환경정비법에 의한 도시환경정비사업을 통해 업무시설을 신축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담당 공무원이 바뀌었다. 완전 다른 분야에서 넘어와 정비사업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사실 일반인에게 도시환경정비사업을 설명한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토지등소유자방식으로 사업시행인가를 받기 위해서는 토지 소유자의 2/3의 동의와 토지 면적의 1/2의 동의가 필요한데 그중에 주소지 불명 인자가 있으면 신문에 공고를 몇 번 내야 하고 이 와중에 임차인 명도소송은 2회를 최고하는 내용증명을 보내고 아니면 인도집행공증이 있어야 하고 어쩌고저쩌고..... 쓰는 나도 기억이 오래돼서 맞는 말인지 모르겠을 정도로 절차도 복잡하고 갖춰야 하는 요건도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당 공무원이 모르는 것 물어가며 공부해서 사업 스케줄을 맞춰줬다. 그때도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 사업이 질질 끌리든말든 그 공무원과는 상관없는 일일 텐데 참 열심히구나 라고.
그리고 11년 차인 지금도 신규 사업 추진을 위해 인허가 과정을 밟고 있는데 하필 또 담당공무원이 주택과에 발령난지 한 달 된 사람이다. 열심히 공부해가며 일을 처리해주는데, 고맙게도 모든 서류를 완벽하게 세팅하지 않더라도 일단 들고 와서 사전 검토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자기는 모든 과정이 다 처음이라 검토하는데 오래 걸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그분이 사전에 그 서류들을 검토하는지 안 하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이런 업무 태도만으로도 고마움이 따르는 게 사실이다.
업무적으로 직접 만나본 공무원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그 고충을 이해할 수 있는 분야의 공무원들도 있다. 나의 경우 아동 복지 담당 공무원들이 그러했다. 아이를 낳고 출생신고를 하러 가면 양육 관련 복지에 대한 '책'을 나눠준다(※책자 수준 아님) 양육수당, 아동수당은 대부분의 가정이 수급대상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이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각종 복지 혜택들이 있다. 그것들에 대한 수급대상, 기준, 내용, 신청절차 등등 한국말로 쓰여있는 걸 읽으면서도 뭔 소린지 모르겠는데 이걸 완벽하게 이해하고 일처리까지 해내는 그들은 정말이지 행정력(?) 갑이 아닌가 싶다. 심지어 어렵사리 머릿속에 넣은 그 내용들이 매년 바뀌고 없어지고 새로 생기는 통에 정신이 있으래야 있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렇게 자주 바뀌는 제도로 인해 화가 난 민원인의 감정 배설을 받아내는 것도 (업무 목록에는 없지만) 아주 비중이 높은 그들의 업무 중 하나라는 사실.
물론 나도 일을 하면서 아몰랑 하며 책임을 회피하려는 공무원도 봤고 배째라식으로 나오는 공무원도 봤다. 올해 초 불거진 LH 사태처럼 공무원(또는 공기업 직원)들을 "정부 권력을 이용해 자기 잇속만 챙기려는 나쁜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많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모든 직군의 사람들이 그렇듯, 공무원들도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도 많다. 또 그렇게 열정 넘치게 일을 해내는 공무원이 아니라고 해서 직업의 안정성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그 모든 노고를 폄하당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사실 내가 이렇게 공무원도 아니면서 공무원들의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으며, 그들 또한 일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해내고 있다고 읍소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나의 부모님이 공무원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성인이 되도록 공무원의 삶을 살며 가정을 이끌어나가는 우리 부모님의 모습을 보며 나는 절대 공무원이 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 공무원과 완전 대비되는 사기업 직장인의 삶을 살면서 아직까지 내 선택에 후회가 없다.
우리 부모님은 정년이 보장되는 공무원이었지만 두 분 다 정년을 채우지 않았다. 안정성이라는 크나큰 장점이 다양한 명목의 일의 고됨을 상쇄해주지는 않았던 것 같다. 더욱이 아버지의 경우 퇴임하기 1년 전쯤인가 일을 하다가 술 취한 사람이 칼을 들고 나타나 협박하는 일을 겪었다. 다행히 아무 일 없었지만 무슨 일이 났다고 해서 누가 그걸 책임져주었겠는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가 겪었을 어려움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고 그저 30년 동안 안정적으로 직장 다니며 월급 받고, 그 이후에도 연금 받으며 걱정 없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만 집중해 부러움을 가장한 손가락질을 하는 걸 보면, 뭐랄까, 구체적으로 묘사하긴 어렵지만 아무튼 불편하다.
이번에 생을 마감한 그 직원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그가 말하지 않은 그의 노동과 직업의식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하지 않으려 한다. 그가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 내가 감히,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의 세력에 한 술 더해 오해를 쌓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