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모든 일생을 돈 버는 일에 바쳐야 하는 걸까?
이전 글에서 좋아하는 일(=글쓰기)에 집중할 시간이 없어 회사도 관두고 방구석에 처박혀 글이나 쓰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글쓰기보다 더 한 나의 퇴사 유발자가 있기에 급하게 글쓰기 버튼을 눌러 써내려간다.
그의 이름은 바로 “책”
다른 이름은 “독서”다.
나는 인생 총량의 법칙을 믿는다. 어릴 때 사고 안 친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 꼭 한 번은 사고를 치고, 공부 한 글자도 안 하던 학생이 언젠가 한 번은 (책 읽고 암기하는 것 아니더라도) 공부에 빠질 일이 생긴다. 갑자기 인생 총량의 법칙 운운하는 것은 나의 독서량 때문이다.
나는 어릴 때 책을 진짜 안 읽었다. 누구도 나에게 책 읽는 게 재미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도 않았고 나도 책을 접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지금처럼 독서교육이 흥하던 시절도 아니었다. 그냥 책을 좋아하는 건 그런 유전자를 타고 난 아이들이나 갖는 기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20대 이후, 특히 3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책에 파묻혀 산다. 올해만 해도 벌써 6-70권 정도 읽었다. 이 속도대로 읽어가면 곧 100권 돌파는 당연하고 1년 동안 150권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이렇게 책 읽고 기록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매년 어느 정도 책을 읽어왔는지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작년만 봐도 대충 100권은 읽은 것 같다.
내가 책에 빠지게 된 계기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학생 때 과제할 시간에도 쫓기면서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었던 기억이 있는 것을 보면 20대 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갑자기 왜 이렇게 책을 읽어댈까?
1. 지적 허영
논문을 쓸 정도는 아니지만 다양한 분야의 지식과 간접경험을 쌓아가며 마치 똑똑해지는 느낌을 받는 게 좋다. 진짜 똑똑하지가 않기 때문에 똑똑한 느낌이라도 받고 싶은 심리가 있는 것 같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냥 딱 지적 허영을 채울 정도로만 책을 읽기 때문에 그걸로 뭘 발전시켜 나가기가 어렵다는 것. (그 이상을 하려고 하면 스트레스가 된다)
2. 문제의식
살다 보면 도대체 이놈의 세상 왜 이러나 싶을 때가 많다. 사회현상의 원인은 무엇이고,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에 대한 고민이 있을 때도 책을 잡는다. 빈부격차, 여성문제, 환경문제 등에 해당하는 주제들이 있겠다.
3. 내적 성장
특정 분야의 지식을 쌓을 때뿐 아니라 생활태도나 가치관을 양의 방향으로 자라게 하기 위해서도 책을 읽는다.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행복의 척도는 나의 내면에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4. 현실도피
말 그대로 어딘가에 빠져들어 복잡한 현실 생각 안 하고 싶을 때 나는 책에 빠진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깊고 깊은 나만의 동굴 속에 들어간 느낌이 들기 때문에 좋은 현실도피 수단이다.
5. 킬링타임
그냥 시간을 때우려고 책을 읽기도 한다. 나는 별다른 취미생활이 없기에. 독서는 시간과 장소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취미이다.
정말 말 그대로 내가 좋으려고 책을 읽는 것이다. 독서는 나의 취미생활이다.
책을 읽는다고 해서 직접적으로 나한테 경제적인 효용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물론, 간접적으로도 가져다준 적 없다. 그렇지만 매 순간, 특히 경제활동에 집중해야 하는 순간 나는 책이라는 친구를 잠시 내려놓기가 아쉬웠던 적이 참 많다. 출근 준비를 하러 가야 할 때, 사무실에서 점심시간이 끝나 점등이 될 때, 더 읽고 싶지만 내일 출근을 위해 그만 책장을 덮고 눈을 붙이러 가야 할 때 등등.
이를 두고 어떤 사람은 그토록 결핍이 있기에 취미가 더 간절해지는 것이라고도 한다.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지만 나는 그런 결핍이 해소된 적이 없었기에 가슴으로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돈 안 되는 취미를 갖고 살아간다. 일하지 않는 주말 이틀을 보내기 위해 나머지 5일을 일해야 하는 것처럼, 돈 안 되는 취미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우리는 수많은 시간을 생계를 위해 바쳐야 한다. 취미생활을 위해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인지, 노동을 하다가 남는 시간에 취미생활을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닭이 먼저 달걀이 먼저와 비슷하게 의문이 드는 부분이지만 어쨌든 둘은 함께 가지 못하고 분리되어 정점에 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1. 돈 안 되는 취미를 돈이 되게 만든다.
2. 돈을 많이 벌어 돈 안 되는 취미만 해도 먹고사는데 지장 없게 만든다.
3. 돈을 많이 안 벌어도 최대한 금욕하며 취미생활과 최소한의 노동을 영위한다.
역시나 뭐 하나 뾰족한 수가 없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회사를 박차고 나와 방구석에 틀어박혀 책이나 읽고 싶다. 미래의 일은 뒷전으로 미뤄놓은 채.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한 순간도 앞으로 달리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멈춰 서서 내가 좋아하는 일에 빠져보고, 돌아다볼 시간이 없었다. 그냥 앞으로만, 앞으로만 가라는 사회의 요구에 따라 정말 진심을 다해 앞으로 내달렸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스스로가 앞으로 더 앞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 와중에 레이스를 잠시 멈추고 책과 함께 나만의 동굴 속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쩌면 신이 나에게 보낸 구원의 천사 같은 존재 아닐까?
쓰다 보니 출근하러 갈 시간이다. 헛소리 그만 하고 돈 벌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