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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승희 Sep 28. 2016

버스킹 말고 드로잉

첫 번째 거리 드로잉

드디어! 거리로 나가서 그림을 그렸다.

한국에서부터 유일하게 준비해 간 프로젝트- 거리로 나가 사람들을 그리는 것.

영화 원스에 남자 주인공이 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다가 여자 주인공을 만나 꿈을 키우는데, 

실제로 저렇게 버스킹이 활성화되어있다면 나도 거리로 나가서 사람들을 그려보자고 생각했다.

아무리 미술을 전공했다지만 한국에서라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림을 그리면 지켜보고 있을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한 번도 시도한 적 없던 일을 아일랜드에는 어차피 아는 사람도 없으니 용기를 내어 시도하게 된 것이다.

드로잉북과 붓펜, 그에 맞는 비닐까지 한국에서 모두 준비해 갔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캠핑 테이블까지 구매했다!- 여기에서 사는 것보다 한국 사이트에서 검색해서 해외 배송하는 게 더 저렴했다.

하지만 막상 시작하려니 계속 미루다가 한국인 친구 성범이가 오늘은 나오냐는 문자를 보고 일단 집을 나섰다.

어학원에서 이미 친구들에게 그림을 그릴 거라고 소문내고 다녔다. 그래야 행동력이 더 생길 것 같아서.



Be a model of illustration! Price ; As much as you want!


그림 비용에 대해 엄청 고민했는데, 결국 원하는 만큼으로 정한 후 예전부터 눈여겨본 자리에 테이블을 펼쳤다. 골웨이 거리의 중간쯤으로 다른 뮤지션들과 겹치지 않고 공간이 넉넉한 곳으로! 버스킹 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상점들도 자기네 앞에서 무얼 한다고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 분위기인듯했다.

드디어 한 관광객이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싶게 생긴 캐릭터길래 말 몇 마디를 건네니  자리에 앉는다. 긴장되기는 나나 그 친구나 마찬가지. 첫 장은 선물로 줬다.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여행 온 쉐이머스. 아주 몇 시간만 골웨이에 머문다고 했다.




일단 한 명을 그리기 시작하니 다른 사람들도 관심을 갖고 몰려든다.

그리고 바로 다음은 더블린에서 결혼 7주년 기념일 여행을 온 아이리쉬 커플.

바비와 제니퍼

남편과 함께 있으니 내가 그림 그릴 때 얘기도 서로 많이 나누고, 사진도 찍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이 골웨이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잘 보지 못해서인지 사람들이 꽤 관심을 보였다.

날씨도 맑아지니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
 스페니쉬 다이아나와 아이리쉬 져드 커플.
내 드로잉북도 펼쳐놓고 기다리면서 보라고 했더니 재미있어했다.




오늘 나오게 한 성범이!

아일랜드 날씨답게 갑자기 비가 와서 맥도날드로 피신했다. 그리고 한 시간 정도 쉬다가 다시 나왔다.

처음으로 받은 유로로 간식을 먹고 충전!




친구인 에오퀘니오와 진성이가 응원차 방문했길래 이들을 그리면서 워밍업하니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다음은 남매(사실 커플인 줄 알았던)




다음 손님은 독일에서 온 리나, 강아지를 안고 왔는데 강아지가 눈을 꼭 감고 있는 줄 알았더니 앞을 볼 수없게 태어난 강아지라고 했다. 첫 번째 장은 강아지와 함께 그렸는데 구경하던 다른 손님들이 강아지를 만지려고 하면 두려워하니 조심하라고 한다. 앞을 못 보는 강아지인걸 알고 불쌍하다는 얘기는 하면 단지 못 볼뿐 다른 건 모두 느낄 수 있다고 얘기해줬다. 내가 봐도 강아지의 표정이 너무 풍부했다!

두 번째 장은 남자 친구 사진을 가져왔다며 그려달라고 했다.

남자친구 사진을 대신 들고 있어준 에오퀘니오.
상냥한 리나와 함께
이렇게 함께 있는 것처럼 그려달라고 한게 귀여웠다.

그녀가 20유로를 내길래 많다고 하니 자기는 내 덕분에 이 시간이 충분히 행복했다고 말했다.

혼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캐릭터가 모델을 자처하니 내가 더 감사할 따름이다. 기껏해야 한 사람당 5분도 안 되는 시간이지만 그 사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얼굴을 보고 이목구비를 포함한 특징을 잡아내고 무엇보다 그의 느낌을 담아내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직접 대화를 나누고 그리는 것이 사진을 보고 그릴 때보다 훨씬 빠르고 쉽게 포착할 수 있는데, 이렇게 그린 그림은 사람들에게 주지만 나는 더 진하게 그들과 함께 한 순간을 기억할 수 있다.



다음은 머뭇거리다 다시 돌아온 아이리쉬 벤과 엘리자베스

흰머리가 있어서 회색으로 했더니 이 그림이 유일하게 마음에 안들었다.


그다음은 아이리쉬 클레어와 리음.

자기들이 마시던 보드카와 손수 만들었다는 맥주를 계속 권하길래 좀 두려웠지만 귀여운 애들이었다.


내 드로잉북을 계속 보며 좋아하더니 본인도 그리겠다며 해골을 그려줬다.


그다음은 김수지 양, 영어로 얼마냐고 물어보길래 한국인이냐고 물었더니 엄청 반가워했다.

프랑스에서 관광학과를 나오고 일 년간 여행 중이라며 우리에게 많은 여행 정보를 줬다. 우연히 한국 사람을 만나니 반가움! 한국 사람이니 특별히 었지만 기꺼이 돈을 지불했다.

지금은 관광고등학교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지막 손님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온 아기.

특이하게 첫 장은 셋이 함께,
두번째 장은 아빠인 모디 혼자 그려달라고 했다.
영어를 잘 못하는 부부였지만 아가가 그 서먹함을 깨주었다.


오늘 총 그림은 14장, 친구들 빼고 손님들만 그린 건 11장,

모두 합해서 70유로=105000원(그 당시 환율로 이렇게 적어놓았다) 한 장당 만원 정도의 괜찮은 수익!

그림을 본 후 내고 싶은 만큼의 후불제이니 나도 그들에게도 괜찮은 가격인듯하다.


무엇보다 정말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이렇게 아일랜드에 오고, 거리로 나가 많은 나라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그림도 그리고.

이런 용기를 가질 수 있다는 게 새삼 감사한 오늘이었다.

아무리 서른 살이 되었어도 충분히 새로울 수 있다. 모든 행동하면 이루어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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