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킹 말고 드로잉 #4

네 번째 거리 드로잉

by 박승희

매번 나올 때마다 묘한 긴장감이 든다. 그리고 첫 장을 그릴 때에도.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고 어떤 사람을 그리게 될지 아직 모르니까,

그리고 그 긴장감이 나를 설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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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손님이 바로 없으면 주위를 둘러보면서 그릴 것을 찾아 헤매게 된다.

이렇게 그림을 그리게끔 만들어주는 공간과 시간을 따로 가지는 것도 좋은 습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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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첫 손님은 더블린에서 온 웬디와 좀 더 슬림하게 그려달라는 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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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쉬 소녀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처음에는 두 명 그린 걸 두 장씩 그려달라고 했지만 지난번 자체 복사한 게 생각나 거절했고,

새로운 포즈로 다시 그리자고 얘기해서 엄청 오래 그리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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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친구 아이슬란. 집주인의 개 펩스랑 같이 그렸다. 우리 집주인도 그렇고 아이리쉬는 이 종을 많이 키운다.

펩스가 늙어서 듣지를 못해 불러도 쳐다보지 않아 얼굴을 보기 어렵긴 했지만, 꼭 같이 그리고 싶어서 데리고 나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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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지연씨와 병일씨.

보통 한국 사람들은 본인 사진 인증샷을 조금 쑥스러워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림 사진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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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저물고 금방 추워져서 일찍 접었다. 그림도 7장밖에 안 그리고 17유로를 벌었다.

맞은편에서 공연하던 남자도 오늘 어땠냐고, 자기는 정말 안 좋은 날이었다고 말하며 떠난다.

묘하게 그런 분위기의 날이 있나 보다. 그러면서도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게 정말 거리의 아티스트가 된 기분이 들었다.


이 날 몇 시까지 그림 그리냐고, 자기 남편이랑 꼭 오고 싶다던 사람이 있길래 번호를 교환해서

다음날 맥도날드에서 만나서 그림을 그려줬다.

러시아에서 온 이 젊은 부부의 러브스토리와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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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모르는 누군가와 약속을 정하고 만나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게

나에게도 참 소중하고 기쁜 순간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보고 즐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장점이고 행복인지 깨닫는다. 심지어 말이 잘 안 통해도 친구가 될 수 있다니!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과연 무엇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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