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그리고 벚꽃비
너무 아름다운 날 울고 싶을 때
오늘 지인이 부친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달려가서 위로해주지 못하는 마음을 담아 조의금은 다른 분을 통해 전달해 주십사 부탁을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봄날, 세상과 이별한 아버지. 아마도 지인은 봄날의 따스한 햇살과 바람이 닿을 때면 내내 아버지가 생각날 것이다. 내가 떨어지는 벚꽃을 보면 아빠가 생각나는 것처럼.
지인과 짧은 대화를 나누다 문득 작년에 써놓고 여태 발행하지 못한 내 아버지에 대한 글을 꺼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 또한 작년 11월, 부친상 조문을 다녀와 쓴 글이었는데 발행을 할까 말까 하다 잊고 있었다.
작년 11월.
나의 온라인 세상의 인연들이 오프라인의 인연으로 하나씩 바뀌어 가던 즈음...
다른 일은 몰라도 애사는 모른 체 하면 안 된다는 평소의 생각대로 '내가 가도 되는 자린가?' 싶었던 마음은 접어두고 함께 가자는 지인의 손을 냉큼 잡고 다녀왔더랬다.
이 글은 작년 11월 작성한 글을 뒤늦게 발행한 것임을 참고해 주시길...
이른 아침 조문은 처음이라...
아침 일찍 검은색 옷을 챙겨 입고 이른 시간 조문을 가게 되었다. 부친상을 당한 지인은 생각지도 못한 우리들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 코로나 시국에 사람 모이는 곳은 서로가 부담스러우니 아버지의 부고를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음에도 평소 베푼 게 많았던지 알아서들 찾아와서 슬픔을 나누고 돌아갔다고 한다.
아침의 장례식장에는 사람이 없이 한산했기에 밥을 먹고 가겠냐는 제안에 일행들은 아주 잠시 망설이다 착석을 했다. 그리고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게 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다.
장례식장에 가면 으레 던지는 질문이 "어떻게 돌아가셨나요?"이다. 물론 이 질문이 빠지지 않았다.
각자의 사정으로 이별을 준비하며 맞이하는 죽음이 있고, 미처 이별을 준비할 시간을 가지지 못한 죽음도 있다. 어떤 죽음도 애통하지 않은 죽음은 없지만 후자의 경우는 그 비통함이 더 크다. 지인 또한 아버지와 이렇게 갑자기 이별을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아직은 장례절차 속에서 슬픔을 깊이 받아들일 시간이 없기에 담담하게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진짜 슬픔은 가족들과 지인들이 함께하는 시끌벅적한 애도의 시간이 지나고 혼자 남게 되면 다가온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내 아버지가 떠올랐다. 지금은 세상에 없는.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에게 여태껏 하지 않던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 나의 아빠가 돌아가신 건 약 14년 전이고, 당시엔 너무 싫고 존재 자체가 온 가족에게 민폐로 느껴지는 아빠였지만,
그렇게 돌아가시고 나니 미움은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슬픔과 애잔함 만이 남았다. 그리고 온통 그의 인생이 불쌍하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그렇게 싫었던 아빠였는데, 그냥 모든 것이 한꺼번에 이해되어버린 게 아빠가 세상과의 인연을 다한 날이라니 참 얄궂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아빠가 돌아가신 후 햇살 좋은 어느 날, 난 이미 장례식장에서 충분히 울었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의 눈물은 없을 것 같았는데, 다시 울음보가 터졌다. 그 좋은 날씨를 즐기며 세상의 좋은 것들을 누려보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난 아빠에 대한 연민이 한꺼번에 몰려왔기 때문이다. 세탁기의 빨래를 꺼내다 울컥 울음보가 터져서 한참을 울었다. 이제 기어 다니던 둘째와 큰아이가 엄마가 왜 우는지 몰라서 옆에 와서 함께 울었다.
가족을 힘들게 하느니 차라리 없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며 아빠를 미워했던 시간들. 나의 이른 결혼은 아빠가 있는 가정으로부터의 도피 목적이기도 했다. 그래서 둘째를 낳고 이사를 하게 되면서는 사실상 연락을 끊고 살았었다. 그 당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서 너무 힘들었던 우리 가족은 나의 상경과 함께 뿔뿔이 흩어져 지냈다. 여동생은 기숙사에, 남동생도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친정엄마는 그간 자식들 때문에 참고 살던 시간을 더 이상 아빠와 함께할 이유가 없어졌기에 따로 살게 되었다. 별거를 한 것이다. 우리가 살던 집에는 아빠만 혼자 덩그러니 남고 그야말로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지냈다. 그 시절 각자 살아내기에 우리는 너무 바빴다. 서로를 돌볼 틈은 없었다. 아주 드물게 아빠에게 안부 전화를 하던 것도 아이를 키우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거의 하지 않게 되었다.
괴로운 마음을 술로 달래시던 아빠는 그렇게 혼자 지내던 어느 날 돌아가신 직 후 방문한 친척에게 발견이 되셨다. 그해 아빠는 57세의 젊디 젊은 나이었다. 그 누구도 아빠가 그렇게 빨리 세상을 등질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죽음, 우리는 아빠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정확한 사망의 시간을 알지 못한다. 평생 씻을 수 없는 불효로 남은 것이다. 그저 경찰에서 추청한 시간이 아빠가 돌아가신 날이 되어 그 날에 해마다 제사를 지내고 있을 뿐이다.
돌아가신 아빠의 선물?
당시 나는 아빠에게 새로 서울로 이사했다는 것을 알리지 않았고, 이사한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시점에 아빠가 돌아가셨기에 아빠는 우리가 새로 이사한 집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상을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꿈속에서 현관문 앞에 환하게 웃고 있는 아빠 모습을 보았다. 생전에 너무도 편안한 모습에 평소처럼 단정하고 깔끔한 옷차림으로 서계신 모습을 보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에 잠을 깨었다. 그 꿈이 너무 생생해 자다 깨어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반가운 전화 한 통을 받게 되었다.
몇 달 전부터 대기를 걸어 놓았던 집 근처 구립 어린이집에서 입소하라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대기가 길어서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않은 연락에 어안이 벙벙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돌아가신 아빠의 선물이라는 것 말고는 설명이 안 되는 입소였다. 아빠는 그렇게라도 딸의 고민을 덜어주고 싶으셨나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날 아빠를 미워했던 마음이 참 부질없게 여겨졌다.
이제는 좋은 기억만을 간직하려 애쓰는 지금,
아빠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바로 그건 만개한 벚꽃잎이 꽃비가 되어 흩날리던 날의 월명공원의 모습이다. 군산의 중앙에 위치한 그 공원을 나는 처음 가보았다.
대학교 1학년이던 해 4월의 어느 날,
평일 낮, 왜 둘 다 집에 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그날 아빠에게 월명공원으로 벚꽃구경을 가자는 제안을 했다. 큰딸의 제안에 크게 기뻐하며 걸어갔던 월명공원의 산책로에는 벚꽃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빠와 단 둘이 걷던 시간이었다. 지금도 봄에 피는 벚꽃 그리고 눈처럼 흩날리는 벚꽃비를 보면 그날이 생각난다.
그날 무슨 이야기를 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빠가 참 좋아하셨던 것만은 또렷이 기억난다.
어느새 20년이 훌쩍 넘은 일이다. 하지만 해마다 벚꽃비가 내리면 나는 그날이 떠오른다.
© pieonane, 출처 Pixabay
아빠는 생전에 왜 그렇게 화가 많이 나 있었던 걸까?
가난한 집안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할아버지 조차 일찍 돌아 가신 가정에 아빠는 어린 나이부터 온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의 역할을 했다. 할머니에게는 남편처럼 의지 하는 아들이었으니 며느리(우리 엄마)에 대한 시집살이는 어렸던 나의 기억에도 꽤 혹독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책임져야 하는 어린 동생들. 부양해야 하는 가족들. 그렇게 자연스레 포기한 아빠의 꿈.(아빠의 꿈은 군인이 되는 것이었다) 아빠의 희생을 알아주지 않는 동생들에 대한 원망은 형제간의 불화의 원인이 되었고 늘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 마음에 술을 찾게 되었고 관계가 악화되는 악순환은 계속되었던 것이다.
살아 계셨다면 칠순.
이걸 깨달을 때까지 조금 더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본다.
이제는 부르고 싶어도 부르지 못하는 이름.
아버지, 아빠.
그립다.
이제는 좋은 것 사드릴 수 있고,
맛있는 것도 다 사드릴 수 있는데
지금 할 수 있는 건 아빠가 모셔진 납골함에
꽃을 바꿔 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니.
2020년 11월에 쓰고
2021년 4월에 발행하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