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똥철학
선물 받은 지 몇 달 만에 펼쳐 읽은 책 서론에, '행복이란 결국 높은 자존감에서 비롯된다'는 저자의 말에서 전날 G와 나눈 대화를 비롯해 여기저기 행복을 다짐하는 문구들이 스치듯 떠올랐다.
G는 행복은 쟁취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 반면에 나는 전부터 견해를 지속적으로 밝혔듯 행복은 결코 소유할 수 없는 개념으로 길 가다 우연히 발견한 들꽃처럼 부유하는 우연의 산물이라는 개똥철학 주관이 뚜렷하다.
고진감래라고 하듯, 아픔이 길수록 짧은 행복의 가치가 더욱 소중하고 고귀한 게 아닐까. 한 번뿐인 각각의 삶 모두가 경중 없이 소중하듯이. 외려 행복이 성취의 목적이나 쟁취의 대상이 되면 권태로움 내지는 지난한 불평불만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궁극적인 본질을 변질시키지 않을까.
이제 겨우 서론만 조금 읽고서 섣부른 판단일 수 있겠지만. 행복의 개념을 자존감 정도와 연관 짓자니 어쩐지 부조리했다. 감정이란 단순하다가도 대단히 복합적이고 또 입체적이기에 외로움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고, 슬픔과 동시에 행복할 수도 있고, 심지어 분노 중에도 느낄 수 있는 행복(대게는 악의적이지만.)이니까.
모쪼록 행복 자체는 반드시 이뤄져야 하는 필연적인 개념이기보다는, 조각보처럼 모으고 모인 짜임새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에게 '건강해지자', '평온해지자'는 몰라도 '행복해지자'는 표현은 역시 부자연스럽다.
다만 행복이 아무리 우연히 발견되는 것이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유지하기 위한 능동적인 자세와 노력은 혼자만이 아닌 여럿이서 상호협력은 필수다.
물론 현재 내 정신 상태로선 자존감을 끌어올리는 작업부터 급선무임은 맞다. 아무래도 나는 자기애니 뭐니 하는 표현 자체가 왠지 모르게 오글거리지만, 누군가에게 내 전부를 내걸지 않고도 스스로의 공허를 채워가는 방법을 획득하는 진정한 의미의 홀로 서기 위한 시행착오를 거쳐야겠다.
당연히 상처받을까, 또 버림받을까 두렵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열 다섯 소녀가 아닌 서른둘의 사 남매의 엄마이자 집안 유일의 가장이다.
예전에 엄마는 그래서 나더러 강해져야 한댔지만, 역시 억지스럽긴 싫다. 단단할수록 쉽게 부러지니까. 아이들의 튼튼한 버팀목으로 우뚝 서되 나답게, 잃어버린 나다움을 찾을 것이다. 이전의 나를 잊어버렸다면 전혀 새롭게 형성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