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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타수 없이 항해하는 함척의 선장

항해하는 항성이 되자.

by 이선하

끝이 나야 시작할 수 있다. 저물어야 피어날 수 있다. 고립되어야 길을 찾을 수 있다. 방황해 봐야 방향을 찾을 수 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겪을 수 있다. 이렇듯 삶 자체가 작용과 반작용의 연속이다.


고난도 행복도 삶이 끝날 때까지 연속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이 또한 지나간다.>라는 격언만큼 명쾌한 진리가 또 있을까 싶다.


추억이든 기억이든, 내게 영향을 끼치는 모든 경험은 나를 이룬다. 지극히 일부든 상당 부분이든 나를 채운다. 그러니 기쁨이든 아픔이든 후회든 성취든 경험 자체로 감사히 수용하고 양분 삼자.


그리고 체득하자. 주어진 숙명에 순응하되 주체적으로,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나 자신임을 매 순간 의식하면서.


해서 억지로 잊는다던지, 도려낸다던지, 강해진다던지 따위의 다짐은 다소 지양한다. 외려 단단할수록 부러지기 십상이니까.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은 바람이 아닌 햇볕이고, *조약돌을 둥글게 만드는 것은 모난 정이 아닌 파도의 쓰다듬는 물결(<무소유>/법정)이다. 진정한 강함은 자연스러운 부드러움이라고 생각한다.


내면의 상처는 개인차와 시간차가 있을 뿐 반드시 회복할 수 있다. 끝내 보기 흉한 흉이나 미미한 고통이 남든 치유의 힘은 어떻게든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시간만이 해결해 줄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궁극적으로는 자발적인 극복 의지가 필요하다. 의사에게 치료를 받고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으려면 내가 움직이고 찾아야 받을 수 있는 도움이다. 자신을 치유하고 보호하는 방법은 결국 자신에게 달렸다.


그러니 나 자신을 잃어선 안된다. 타인은 내 삶에 영향을 끼칠 순 있고 때로는 공조하고 협동하는 공생의 존재지만, 내 정체성의 주인은 오롯이 나 자신이어야 한다.


우리는 탄생과 죽음이라는 주어진 숙명에 대해 진리를 탐구한 수많은 종교인과 학자들이 수 천년에 걸친 지난 지금까지도 왜?라는 이유에 여전히 답을 찾을 수 없었고 없고 없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가 어떻게, 무엇으로 살 것인지? 에 대한 과정은 다름 아닌 스스로만이 정할 수 있다.


선대의 자취를 따르기도 하면서 또한 스스로 선구자가 되어 후대에 지침을 전할 수 있다. 모쪼록 세상에 태어난 이상 공생으로 영위할 수 있는 삶이니까.




내게 사랑은 삶의 원동이다. 나를 살리는 구원이다. 그렇기에 반대로 나를 죽일 수도 있음을 몸소 배웠다. 역시 경험만큼 좋은 스승은 없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죽음은 적어도 사랑이 될 수 없음을 나는 정할 수 있다.


꼼짝없이 손발이 모두 묶여 고립되어도, 조타수 없는 함척이라도 삶이란 바다를 향해 자유하고 항해하는 선장이 되자. 지금 당장 방법을 알 수 없어도 분명 내 삶의 과정은 오직 나만이 모색하고 또한 찾을 수 있다.


빛에 의존하지 않고 언젠가는 스스로 빛나는 존재가 되어 머무르지 말고 떠나자, 흐르자. 저물어가는 종결과 동시에 피어오를 시작을 향해. 이다음을 향해. 목전에 폭풍이 몰아치더라도 두려워 말고 나아가자. 나는 기어코 해낼 수 있다.




3막 3장을 펼칠 준비는 서서히 시작되고 있다. 내 무대에서 주어진 각본과 연출은 없다. 그때그때 주어진 상황에 따라 분석과 블로킹은 오롯한 내 몫이다.


그동안의 경험치를 토대로 이전과는 훨씬 성숙하고, 원숙하고, 노련해질 나는 나를 돋보여줄 극적인 조명도 배경막도 소품도 없이 맨몸일지언정 세상이란 무대에서 스스로 아름답게 빛나는 항성으로 거듭날 것이다. 이렇게 적다 보니 의지보단 거의 투지에 가까울 지도. 이 대신 잇몸이라고, 사랑(戀愛)이 없으니 대체 원동이 투지가 된 모양이다.


모쪼록 나의 가치는 그렇게 정하기로 했다. 언젠가 노선은 또 수정되고 바뀔 수 있겠지만 그것 또한 내가 정할 것이다. 내 삶을 항해할 조타수 없는 함척의 선장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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