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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

사람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by 이선하

곧 세 자릿수도 거뜬해질 인간의 수명이라도 잠시 소풍에 비유될 만큼 짧은데, 하물며 그간 내가 눈앞에서 목도한 여러 죽음은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바이탈사인도 드라마처럼 극적이지 않다. 끝은 그냥 끝이다. 그리고 매 순간 도처에 있다. 한순간의 끝으로 부질없고 황망한 세월이다.


아무래도 쓸데없이 비장한 비약이지만 한길 속도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사람의 일이렷다. 해서, 뭐라도 남겨야겠다는 의지에 반해 여전히 머릿속은 복잡하니 경황만큼 두서도 없지만 마지막 흔적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간신히 손을 놀린다.


그러고 보면 매 출산마다 유언장을 써뒀다가 무사 순산(?) 후 파기했다. 지난 네 차례의 분만에 비하면 이번 건은 대단치도 않지만 괜스레 대비해야 될 것만 같다. 술은 안 마셨지만 의욕은 상실한 맨 정신이다. 창피하더라도 이번 기록은 삭제하지 않고 드문드문 꺼내 읽을 요량이다.


기실 아무리 과정이 중요한들 어떻게 끝을 맺는지 만큼이나 우선일 순 없다. 결말에 따라 과정은 미화되거나 퇴색되니까. 보잘것 없이 하찮기만 한 삶이라 딱히 미화될 거리도 없지만 끝맺음만큼은 조금이나마 존엄하길 바란다. 살면서 목적한 유지와 사명이 완결되든 아니든 죽음은 필연이기에.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첫 구절 속 고백처럼 나는 부끄러움 많은 삶이었을 뿐만 아니라 꿈은 잃고, 실속은 없고, 책임만 가득한 실패자다.


십중팔구는 내다 버린 자존심 중 딱 하나, 오롯이 내가 짊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간신히 영위하는 일상에 기한을 설정한 디데이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네 자릿수라며 턱턱 숨 막혔는데. 막상 며칠 뒤에 벌어질 갑작스러운 변수를 앞두고 심란하다. 실은 오래오래 잘 살고 싶다는 생존본능의 발동인지 뭔지.


연일 이어진 목적의식 없는 너절한 일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어쩌다 주어진 행운조차도 모래알처럼 손틈 새로 흘렀다. 모래알도, 물결도 공통점이라면 별처럼 반짝이며 잠시잠깐 닿을 순 있으나 결코 내 것이 될 순 없었다. 내 것은 없었다. 단 한 번도, 한 순간도. 그렇게 흘러넘친 찰나가 모이고 모여 지금의 나라는 흐릿한 형태를 빚은 듯하다. 언제 어디서 바스러질지 모르게.


내게 없는 반짝임에 매료되어 몰두하느라 주변은 아랑곳없이 온 마음을 사르도록 좇고 탐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가질 수 없었고 마음만 살랐다. 이도저도 다 너절해서 동굴 속으로 침잠하고자 들면 나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 내려하고, 그렇게 억지로 끌려와서 각 잡고 버티려니 또다시 밀어내는, 도무지 어느 장단에 맞춰야할지 모르겠는 파란 같은 삶이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책망하거나 전치하고 싶지 않다. 자기연민은 더더욱 싫다. 내 몫의 짐은 과거의 내가 선택한 결괏값인 만큼 감수해야만 한다. 비단 나만의 실책이 아니더라도. 소치와 경중을 막론한 모든 부덕과 부채는 눈 감는 순간까지 가슴속에 토 달지 않고 매달되, 어리숙했던 과거의 나에게 건네는 서투른 화해의 손길은 여기까지가 끝인지 아닌지 모를 변수를 앞두고 지금의 나만이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모쪼록 짧은 삶이기에 연령별로 과업이 주어진 까닭이 납득되는 요즘이다. 아무리 백문이 불어일견이라도 체득을 해야지만 비로소 볼 수 있는 경솔함이 개탄스럽다. 거센 파도 앞에 모래성을 쌓느라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했다. 타의 반, 자의 반으로 보편타당한 노선을 너무 많이 벗어나서 이 나이쯤되니 더 이상 아등바등하기가 지친 것도 같다.


곧 다가올 이 변수가 거듭나기 위한 새로운 시작이 될지 완전한 끝이 될지, 또는 둘 다가 될지 알 순 없지만. 늘 그렇듯 <덤>과 같은 생이 또 주어진다면, 나를 향한 타당한 비난에 마땅히 감사하겠다. 너무 견고하지도, 그렇다고 호락호락하지도 않은 바운더리를 세우고 지키겠다. 입과 마음은 천천히 열고 실천은 곧장 하겠다. 보다 선하하겠다. 삶의 원동 요인을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찾아내겠다.


그렇게 지난한 삶이 다시 지지부진 이어지는 어느 날 완전한 끝을 직감할 수 있다면, 실망과 아픔마저도 감사히 여기며 감싸안겠다. 운명 같은 우연을 오래도록 경험할 수 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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