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하는 과정

그래도 기왕이면 예쁘고 빠르게

by 이선하

요즘 동호회에서는 시작 전에 강사가 화이트보드에 미리 적어둔 오늘의 프로그램과 의도, 관련 이론 등을 설명해 주고 지상운동과 스트레칭을 거쳐 워밍업, 그리고 본 운동으로 이어진다.


오늘의 주제는 IM. 종목별 드릴까지 두 시간 안에 소화해야 했기에 여느 때보다 타이트한 일정이었다.


강사의 뽀짝한 서체.


‘네 가지 종목(IM)을 알아보자’라는 문구가 어째서 ‘내 종목’으로 보였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출사표를 던졌던 호기는 어디 가고, 막상 경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슬슬 몸이 굳는다.


어제 새벽 강습에서 또 하체가 가라앉아 킥 타이밍이 전혀 맞지 않는다는 피드백을 들은 터였다. 이래 가지고 될까, 경기까지 두 달도 채 안 남았는데 정말 접영으로 나가도 될까. 이게 맞나. 회의감에 잠식되어 끝없는 미궁 속으로 가라앉았다.


? | 자기는 가끔 기계같이 보여. 확실히 많이 좋아졌고 잘하는데, 각이 너무 딱딱 맞아떨어진달까. 선생님이 왜 부드럽게 하라고 하는지 나는 단박에 알겠더라.


그렇다. 이제 와 이 나이에 선수가 될 것도, 아니, 될 수조차 없는데, 어떤 면에서는 선수 못지않게 강박적이다. 충분히 즐겨도 될 법한데 어째서인지 자유롭지 못하다.


더 힘을 빼고 싶다. 더 즐기고 싶다. 분명 좋아서 하는 수영인데, 물살에 몸을 온전히 맡기지 못하니 흐름을 탈 여유가 없다. 즐겁게 헤엄치던 본연의 즐거움을 다시 찾고 싶다. 물을 좋아하면서도 왜 이토록 조바심이 날까. 숨이 막힐까 봐? 쫓길까 봐?


모르긴 몰라도 실망감은 그만큼 기대치에 비례한다. 그러니 저번 기록에서 크게 좌절했던 까닭도 어쩌면, 늘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여기면서도 내심 발전 가능성에 대한 기대치가 생각보다 더 컸나 보다.


살아있다는 건 곧 욕망이다. 욕망은 배우고 싶고, 발전하고 싶고, 먹고 싶고, 숨 쉬고 싶은 활동으로 이어진다. 숨 쉬기조차 무기력했던 내가 수영으로 되찾은 삶은, 결국 이러한 욕망의 발현이다. 욕망은 나쁘지 않다. 삶을 지속하게 하는 원동력이니까. 특히 나처럼 책임이 막중한 사람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수영은 고독한 운동이라지만, 누군가의 기록과 비교해야 비로소 나의 위치를 체감할 수 있다. 개인레슨을 받으면서도 단체 강습을 병행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속도 기록은 강한 자극이고 환기다. 그래서 수영을 하면 할수록 목표는 구체적이고 높아진다.

발전하기 위해서는 폼과 속도를 욕망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분야가 으레 그렇듯, 결과에만 매달리면 결국 무너진다. 나는 수영을 아주 오래오래 하고 싶다. 몇십 년 동안 매일 새벽마다 수영장을 꾸준히 다닌 어머니들처럼. 그래서 아직은 무너지고 싶지 않다. 하지만 발전하고 싶은 욕망도 멈출 수 없다.


그렇다면 절충점은 하나, '과정을 즐기는 것'이겠다. 느리더라도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내 수영의 과정을, 매 순간 충분히 즐겨야겠다.


막상 실전에서는 다짐처럼 쉽지 않겠지만, 조급해질 때마다 되새기자. 지금은 내 수영 인생 수십 년 중 지극히 일부분일 뿐이라고. 내 목표는 선수가 아니라, 발전하는 생활체육인이라고. 그래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내년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나는 점점 더 수영을 잘하고 싶다.


기왕이면, 예쁘고 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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