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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하 Feb 01. 2021

어느 새벽의 소나기

사랑에 관한 자질구레한 잡념.

Picture by. Cdd20 / Pixabay


    때때로 그는 일터를 거쳐 부모님 집에서 돌아오는 주말 밤이면 집 앞 편의점에서 행사 중인 4캔들이 만 원짜리 수입 맥주를 사온다. 평일엔 파트타임 알바를 하는 일명 반업 주부인 나는 홀로 여섯식구가 사는 집의 밀린 살림을 수습하느라 귀중한 주말을 할애하다보면 술이 고프긴 마찬가지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그의 손에 쥐어온 행사 맥주 한 팩과 안주거리를 흔쾌히 건네 받아 한 상 차렸다.


    그는 유튜브로 자신이 좋아하는 올드 팝송을 찾아 틀고, 안주와 함께 술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서로 딱히 건배를 나누는 일 없이 그저 자리만 곁을 지킬 뿐 각자 소일에 전념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별반 다를 게 없었는데, 유독 그날따라 일찍 취한 탓인지 슬슬 기어오르는 궁금증을 참지 못한 나는 그에게 질문 하나를 툭 던지고 만 것이다. 너는 대체 무엇으로 네 사랑을 확신할 수 있는 거냐고.


    글쎄, 잘 모르겠는데. 그의 말에 나는 대답했다. "내가 아는 사랑은 항상 무거웠는데 네가 말하는 사랑은 말 뿐이라 너무 쉽고 못 견디게 가벼워."


    "난 말 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꼭 무거워야만 사랑인가."

    "너는 내가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은 해?"

    "궁금은 하지. 매번 그렇진 않지만."

    "늘 궁금하지 않아?"

    "꼭 그래야만 하나."

    "모르겠어. 근데 내가 느끼는 너의 사랑도 솔직히 사랑인지 모르겠어. 아무리 오래 된 사이래도 넌 처음부터 항상 같은 식이었어, 좋은 게 좋은 거고 아님 말고 식의 태도만큼은 소나무처럼 한결같아. 어쨌든, 사랑이고 자시고 누군가에게 호감을 가지면 그 사람의 기호나 취향이 무엇일지 호기심이 생기지 않나?"

    "... 그럼 어떻게 하면 너에게 내 사랑을 증명할 수 있을까?"

    "나야 모르지, 네 사랑이잖아."


  

   영문을 몰라 그저 벙 찐 그는 배우 김항선의 그 유명한 명대사 "이 뭔 개소리야?"를 모사했다. 답변의 성의가 가상해서 애써 소리내어 웃어주다가 문득 담배가 고팠던 나는, 영화 <타짜>를 찾아 틀며 서른 번째 시청답게 장면마다 대사를 줄줄이 외우도록 심취하는 그를 내버려두고 혼자 현관을 나섰다.


    집에서부터 돌계단을 올라 소나무를 마주 보는 벤치 앞으로 향하는 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영화 <시월애>에 이런 대사가 있지, 사람에겐 숨길 수 없는 세 가지가 있는데 기침, 가난, 그리고 사랑이라고. 딱히 궁금할 것도 없고 안달 나거나 절절하지도 않으면서 그는 무엇으로 자신의 사랑을 확신하는 걸까. 하긴, 가수 김광석은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했었지.


    고작  캔이라도 취기가 금세 오른 탓일까. 다섯 번째 개비를 입에 물고서 예상과 달리 벤치가 아닌 맨바닥에 철퍼덕 엉덩방아를 찧음과 동시에 살갗이 까질 만큼 팔꿈치로 격렬한 하이파이브를 마친 찰나였다. , , , 초를 세듯 떨어지던 빗방울이 이내 쏴아아 퍼붓듯이 빗발쳤다. 샤워한  머리카락의 물기가  마르기도 전에 빗물 세례를 한껏 받은 것이다.


    , 이게 뭐지 싶어 헛웃음이 절로 났다. 한번 거세진 빗줄기는 그칠  몰랐다. 잠시  때리다 서서히 몸을 일으켜 소나무 가지가  앉은키만큼 내려앉은 벤치로  앉았다. 그래 봤자 솔잎이라 사이사이로 빗물이 새어들었지만, 꼬나문 담배 끄트머리에다 꿋꿋하게 불을 지폈다. 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 뭐냐고 대체.  기가 막힌 타이밍 뭔데?  시끄럽게  바에 찬물이나 뒤집어 쓰라는 건가. 자조 섞인 웃음소리는  간드러진 고양이 울음소리에 묻혔다.


    야옹, 이야옹 소리에 따라 뭬옹, 뭬엙옹하고 화답했다. 요란한 응답을 주고받는 동안 멀찍이서 들리던 울음소리는 점차 가까워지더니 이내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추위에 바들바들 떠는 자그마한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비쳤다. 뭬옹, 뭬옹. 고양이 흉내에 싫증이 나 불쑥 고쳐 말했다. 미안하지만 여기엔 네가 주워 먹을 게 없어. 비 맞지 말고 얼른 어디로든 들어가, 짜식아. 내 말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양이는 잠시 동안 내게 호박빛 시선을 내던지고선 마저 제 갈 길 갔다.


    빗줄기는 점차 수그러졌지만 불을 머금은 담배 연기는 아직 사그라지지 않았다. 후- 빗물인지 한숨인지 모를 한 모금마다 부질없는 사념을 태웠다. 안 그래도 눈 앞엔 크고 작은 난관들이 널리고 널렸건만, 사랑 타령이나 하고 있을 정신머리냐고. 좀 전까지 함께 비를 맞으며 야옹거리던 고양이마저 곁을 떠나자 세상에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진 듯 문득 공허했다. 그러니까, 대체 사랑이 뭐기에? 사랑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닌데 이토록 외로울 건 또 뭐람.


    생쥐꼴이 되어 종종 헛웃음을 내뱉는 동안 어느새 소나기는 그쳤다. 붉은 점멸의 끝자락이 까만 재를 떨구고 공중에 흩어진 희뿌연 연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에 바지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씻고 잠이나 자야겠다. 터덜 터덜 돌계단을 내려가는데 사방은 온통 어둡고, 이따금 끔뻑이는 가로등에 비치는 소나무만이 오직 그대로였다.



* 김광석 /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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