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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하 Feb 12. 2021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1.

그와 그녀의 이야기.

Picture by. Cdd20 / Pixabay

 

   만주를 떠돌던 그의 아버지는 어느 시골 지주의 영애에게 장가를 든 후 남향해서 바닷가 마을터를 잡았다. 그의 부모는 슬하의 팔남매 중 전쟁통에 어린 목숨을 잃어 성인까지 생존한 이들은 그를 비롯해 남매였다. 위로 2명의 누나와 형, 아래로 남동생을 둔 그는 차남이자 넷째였다.  집안은 유복했으나 점차 가세가 기울면서 광산만큼이나 빚더미가 쌓였다.


    작은 누나가 열병이 들어 배고픈 내색조차 못하고 마냥 주린 배를 움켜잡았다. 드문드문 아버지 얼굴이라도 뵈려면 내키지 않아도 작은 집으로 찾아가야 했다. 학창 시절엔 백용(白容, 새하얀 얼굴)이라는 별호로 불리며 반듯한 용모와 잡학다식으로 선배들 예쁨을 받았던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글쓰기에 마침 재능이 있었는지  백일장 대회에서 장원을 받은 이력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고등학교 입시에 합격한 그는 서울로 상경한다. 작은 누나는 성당에서 일을 하며 그의 학비를 벌어다 주었고, 그가 대학생이 된 이후 막내 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원하던  진학을 포기하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금융권 회사에 취한 그는 마음에 들지 않은 직장 상사와의 갈등으로 1년 간 대화를 하지 않았다. 결국엔 상사가 먼저 다가와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그의 첫사랑은 명문대 미대 출신이었는데 어머니의 눈에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헤어질 것을 종용했다. 지극한 효자였으므로 그 뜻을 거스를 수 없었던 그는 이내 이별했고 이후 반년 간 어머니와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불혹이 다 돼가도록 장가를  고집불통 작은 누나로부터 4살 연하의 여교사를 소개받다.




    사주팔자가 오간 지 3일 만에 혼인 올린 그녀의 부모는 애초에 낭만이랄 것도 없던 만큼 결혼생활 역시 순탄치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고된 시집살이를 견디지 못해 된장이고 간장이고 장으로 끝나는 건 듬뿍듬뿍 찍어먹거나 앉은 자세로 부러 엉덩방아를 쿵쿵 찧는 뱃속에 들어선 애를 떼고자 부단히 노력했지만 하등 소용없었다.


    식구들마다 무슨 갓난쟁이가 족히 한 달은 된 아가 같다며 감탄할 만큼 머리숱 많고 뽀얀 피부의 그녀는 건강하게 태어났다. 이후 해마다 습관성 유산을 반복하던 어머니는 부처님께 빌고 빌어 다섯 번째 임신에서야 그녀의 남동생이 미숙아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소 온순한 인상으로 무뚝뚝했으나 술만 마시면 돌변하며 몹시 포악하게 굴었다. 아버지는 그녀 자신과 동생 앞에선 평생 손을 올리지 않았지만 어머니에겐 예외였다. 말싸움으로는 결코 지지 않고 맞서는 어머니는 그러나 만취하여 더욱 사정없이 가해지는 물리적 폭력 앞에선 속절없이 무력했다. 어릴 적 그녀는 술냄새 풍기는 안방에서 어머니가 아닌 낯선 여자가 드나드는 것을 더러 목격했다.


    공교롭게도 그녀 역시 아버지의 양복 사업이 망하면서부터 가세가 기울었고 억척같은 어머니가 눈물을 머금은 빨간 내복 장사를 시작으로 임대업까지 확장하며 간신히 집안 살림을 건사다. 15남매 중 셋째이자 장녀로서 동생들 뒷바라지라면 치가 떨린 그녀의 어머니는 집 안팎으로 바쁜 와중에도 딸 아들 차별 없이 공부시켰다. 자라기론 귀한 아들과 가난한 딸이었지만 갖은 고생 끝에 그녀는 천직으로 여긴 교사가 될 수 있었다.


    그녀 어머니 보며 평생 독신으로 살 요량이었다. 어머니는 처음엔 반대하지 않았다가 막내아들의 결혼식 동안 진절머리 나는 시댁 식구들이, 장녀는 무슨 하자가 있기에 여즉 혼인을 못하고 여서 얼굴이나 비치냐고 쑥덕거리는 군소리 군말 없이 들었다. 딸에게도 역시 오래도록 함구할 만큼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앓는 소리로 "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 네가 결혼하는 걸 보고 싶다"에 약한 딸의 두 손을 붙잡고 푸념할 뿐이었다. 이후 이십 년도 채 되지 않아 그녀의 어머니는 당신의  말을 사무치게 후회다.




    결국 그녀보다 두 살이 어린 이모가 건너 건너 알게 된 그의 작은 누나와의 주선으로 그와 그녀는 만나게 됐다. 둘은 꼬박 네 달을 교제했다. 누가 그러던가, 교제 기간이 네 달 이상이면 연애결혼으로 친다고. 이미 서른을 훌쩍 넘겨 각자 집안의 등쌀에 떠밀린 그와 그녀 사이엔 풋풋한 설렘도 뜨거운 열정도 없었. 다만 그녀가 결혼을 결심한 데엔 소소한 계기가 있었다.


    주말마다 두 사람이 절대 만나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형네 어린 조카 남매를 보러 가기 위해서다. 장남이라면 군대도 못 가게 막아 병역기피자로 만들 만큼 아끼고 아낀 그의 어머니는 번번형수와의 신경전으로 보이지 않는 날을 세웠다. 물론 그녀는 이러한 속사정까진 미처 몰랐지만, 조카들을 살뜰히 챙기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내심 호감을 느꼈다.


    조카들도 저렇게 위하는데 자기 자식한텐 아주 끔찍겠구나, 그녀의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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