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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하 Feb 14. 2021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3.

그들과 큰딸의 이야기.

Picture by. Cdd20 / Pixabay


    딸은 10살 무렵까지 인근에 외가댁, 고모댁, 작은아빠댁 등등 전전하다시피 맡겨졌지만, 그녀 해마다 작성한 조퇴 기록부 통상 한 장 반다. 맞벌이어도 아이들이 아프면 조퇴하고 케어하는 것은 늘 그녀의 몫이었다. 대신 그는 주말마다 큰딸을 뒷자리에 태워 자전거를 타고 본가에 다녀왔다. 부쩍 말수는 줄었어도 문안마다 부모의 혈압을 체크하고 이따금 장모가 디미는 고봉밥을 묵묵히 입안에 욱여넣음으로써 가정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을 그였다.


    그들이 보기에 큰딸은 타고난 재주가 많았다. 글짓기, 노래, 영어 말하기, 기악까지. 이중에 어느 것 하나 딱히 각 잡고 가르친 것도 없었다. 특히 자신들은 음악적 재능과는 전혀 요원했는데 한 번 들은 단선율을 피아노 건반으로 따라 옮겨 치거나 노래 부르는 큰딸을 보며 어디서 이런 애가 왔는지 신기했다. 그는 큰딸이 자신을 닮아   쓰고 음악에 조예가 깊다고 확신했다. 무대에서 노래하는 딸을 보며 장래에 뮤지컬 배우가 되길 소망했다. 그녀는 부모가 제대로 뒷받침해준다면 그 재능이 날개를 펼치리라고 여겼다. 그들의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들은 맞벌이를 했고 큰딸은 합창단이나 콩쿠르 등 외부활동이 잦았다. 때문에 열 살이 되기도 전부터 큰딸은 혼자 알아서 다니고 처리하는 일이 예사였다. 그녀는 응원과 더불어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짬짬이 큰딸이 관심을 가질 만한 배경지식과 정보를 조사해서 알려주거나 너무 먼 거리는 기동력을 동원해 몸소 데리러 오갔다. 발 없는 말이 아낙네들 사이사이로 퍼졌다. 사정을 모르는 치마들이 심심한 주둥이를 놀려 그녀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쟤는 늘 혼자 아니면 아빠 하고만 다니는 걸 보니 엄마가 없는 앤가 봐.


    관악기를 배운 지 1년도 채 안되어 교내 경연대회에서 1등상을 거머쥔 큰딸에게 그들은 더욱더 커다란 힘을 실어주고 싶었다. 호기심 반, 다소 흥미로움 반으로 어설피 발을 담그자 어마어마한 파장이 일었다. 큰딸예중 입시에 합격해 명실상부 기악부 전공생이 됨과 동시에 그가 쉰을 넘면서 퇴직했다. 정확히는 정년보다 일찍 퇴직하게 된 것이다. 수입이 현저히 줄어든 그들은 예체능에 드는 사교육비가 가히 천문학적인 액수임을 비로소 실감했다. 예체능 지망생 상당수가 부유한 집안인 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프로용 악기는 연습용보다 금액이 최소 20배가 차이 났다. 거기에 주기적인 검진 및 수리 비용이 따로 들었다. 레슨비는 회당 한 시간에 10만 원으로 콩쿠르나 입시가 임박하면 주 1회론 어림없었다. 큰딸의 담당 교수는 더 값비싼 악기로 바꾸라고 권했는데, 전공생의 통상적인 소지 악기가 그 까닭을 납득시켰다. 열네 살 난 아이들이 메고 다니는 10만 원이 넘는 악기가방 안에 몇만 원짜리 악보 몇 권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족히 5천만 원은 우스운 악기가 모셔져 있다. 학교 등록금 또한 웬만한 대학교 뺨쳤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따로 있었다.


    교내에선 선생들로부터 내려온 제자들 간의 파벌과 서열이 암묵적으로 나눠졌다. 오래도록 명문대와 권위 있는 단체 또는 정상급 솔리스트를 목표로 탄탄하게 훈련된 기라성 같은 동급생과의 경쟁이 일상이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할 재능과 재력이 아니고서야 한 번 벌어진 격차는 쉬이 좁혀지지 않았다. 큰딸은 열등감과 간혹 수치심에 얽매여 숨 막히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이대로 음대는커녕 예고 진학조차 곤란했다. 그들은 사교육비 충당만으로도 허덕이는 와중에 갈수록 맥을 못 추는 큰딸을 맥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큰딸의 실력 월등하게 출중하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자신이 그랬듯 큰딸 또한 원하는 꿈에 도달하기까지 마음을 다잡길 바랐다. 부모가 아무리 지원한들 결국 성취 여부는 제 몫이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지듯 고통을 이겨내도록 격려했다.


    그는 이런 상황 자체를 모면하고 싶었다. 자신의 어릴 적 불우함과 겹쳐 보여서 못 견디게 싫었다. 이런 우물 안에 갇혀 괴로워하느니 차라리 더 넓고 새로운 세상으로 내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협소한 우물이라 한들 너무나 깊고 단단해서 지금의 재력으론 택도 없었다. 이제 그는 하늘에서 동아줄이 떨어져 내리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고 몸부림이라도 쳐야 했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야 큰딸은 그들의 입장을 오롯하게 헤아렸다. 그생각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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