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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하 Feb 15. 2021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4.

분열.

Picture by. Cdd20 / Pixabay


    무상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 그의 부모와 큰누나가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남은 형제들 더 이상 명절에도 모이지 않았다. 그는 더더욱 말수가 줄었. 큰딸에게 애정표현은 극히 드물었어도 늘 무언가를 설명하느라 바빴던 입은 점 열지 않았다. 그는 표정조차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가끔씩 그와 대화를 시도했으나 흡사 돌벽에다 대고 혼자 떠드는 양 답답했다. 그런 까닭에 그가 구직 명분으로 몇 마디 툭 꺼낼 때면 그녀는 저 자존심에 어렵사리 용기를 냈겠구나 싶어 흔쾌히 부응했다. 모자란 돈은 대출을 받아서라도 선뜻 내줬다. 그의 속내를 까마득히 모른 채.


     그러니 그의 일확천금을 노린 요행이 시작된 정확한 시점을 알 수 없는 것이다. 큰딸이 기악부 전공생이 될 무렵인지, 그가 회사에서 퇴직한 무렵인지, 작은딸이 태어날 무렵인지, 신혼집을 장만한 무렵인지. 어쨌든 그는 그녀를 비롯해 형제, 지인들에게 빌린 돈과 퇴직금까지 몽땅 주식에 들이부었다.  기대했을 선물 같은 돈방석은 어린 시절의 광산만큼이나 빚더미 쌓였다. 양산을 거듭거짓말의 처참한 말로였다.


    그녀는 생전 처음 그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믿음을 저버리다 못해 자신을 업신여긴 그를 향해 분노했다. 그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녀의 월급이 차압되기 직전에야 부랴부랴 그들은 서류상 이혼을 명목으로 부부 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어린 딸들에겐 비밀이었다. 상황이 안정되는 대로 딸들에게 설명하자고 협의했으나, 그녀는 이대로 끝나버릴 줄은 미처 몰랐다.


    현관 앞에 즐비한 담배꽁초가 부쩍 늘어났, 그 앞에 독신으로 살다 간 그의 큰누나로부터 계를 못 받은 사람들까지 더해진 빚쟁이 무리가 문전성시를 이뤘다. 개중엔 그의 제수도 포함됐다. 돈을 빌려 받은 건 그인데 액수는 물론 주택을 담보 잡은 내용까지 금시초문인 그녀를 향해 손아래 동서가 삿대질을 해댔다. 그 점잖던 양반의 본성인지 아니면 변모인지간에 누구나가 그렇듯 돈 앞에선 속수무책인 것이다.


    큰딸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눈치챘지만 어른들은 좀체 알려주지 않았다. 큰딸은 집 안팎으로 고역이었다. 학교에선 친구가 없었고, 미래는 가망이 없었고, 집안엔 안락이 없었다. 학교에선 등록금 독촉장을 수차례 받았고, 답 없는 미래로 스트레스를 수없이 받았고, 집안에선 화풀이를 수시로 받았다.


    그는 점 신경이 곤두섰다. 그의 주머니가 토해낸 것을 비롯한 겹겹이 쌓인 복권 뭉치가 온 집안에 굴러다녔다. 컴퓨터 화면에는 종일 주식 프로그램 아니면 음란물 영상이었다. 하루는 백주대낮에 우리들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냐는 큰딸의 질책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그는 내복 바람의 중학생 딸을 집 밖으로 내쫓았다. 아홉 살 동생은 내복마저 걸치지 못했다. 저 사람이 초경 선물로 장미꽃 한 송이와 케이크를 사다 줬던 아비와 동일 인물이 맞나? 큰딸의 의문은 수치심을 앞지르지 못했다. 맨발의 자매는 추위 속에오들오들 떨었다. 이후에도 그는 기분이 상할 때마다 훈육이랍시고 딸들을 내복 차림 아니면 나신으로 내쫓았다. 한겨울이었다.


    마침내 기악 전공을 포기하기로 완전히 마음먹은 큰딸은 심사가 뒤틀렸다.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각종 상장과 트로피를 갈기갈기 찢어발기거나 깨부숴서 쓰레기봉투에 쓸어 담아 버리고도 시원찮았다. 어느 날 새벽 큰딸은 컨테이너로 둘러싸인 자신의 방 안에서 거울에 비친, 그와 닮은 자신의 모습을 보며 망가뜨리고 싶었다. 막상 파고드는 날카로운 감각에 덜컥 겁이나 끝을 보지 못했다. 이도 저도 아닌 자신의 애매함이 지긋지긋했다. 도로 잠자리에 드니 방문 틈새로 새어 들어온 그림자가 컨테이너 벽 위로 아른거렸다.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그녀는 직장에서 근무 중이었고 그와 딸들하고만 집 안에 있었다. 그는 비장하게 외투를 걸쳐 입고 큰딸에게 만 원, 작은딸에게 천 원 한 장 쥐어주고 집 밖으로 나갔다. 그는 여느 때처럼 말없이 무표정이었다. 그럼에도 어딘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큰딸은 맨발로 뛰쳐나가 뒤쫓았다. 아빠! 어디 가요? 아빠!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 길로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큰딸이 다시 그를 만나기까지는 꼬박 10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그가 가족의 곁을 떠난 건 어쩌면 나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큰딸의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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