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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하 Feb 20. 2021

박정자 선생님을 꿈꾸며

자기 자신부터 분석해보자, 심플하게.

Photo by. Ruvim Noga / Unsplash


    내 생애 첫 연극 관람은 5~6세 무렵에 엄마와 함께였다. 당시 대학로 파랑새 극장에서, 얼핏얼핏 떠오르는 배우들의 의상으로 짐작컨대 <시집가는 날>처럼 조선시대 결혼식을 배경으로 한 아동극이었다. 사진은커녕 팸플릿 한 장 남지 않아 흐릿한 기억 속에서 선명한 정서만이 남았다. 으레 아동극 특성상 관객 참여 유도한다. 그 아동극에서도 어김없이 한 배우가 객석으로 나왔다. 나는 그가 물색한 맨 첫 번째 신붓감 후보였다. 너무 쑥스러워서 배우가 손을 잡아 끄는데도 나서지 않았다. 배우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으니 얼른 다른 관객을 신부로 삼아 무대 위로 데려갔다. 낯빛이 차츰 어두워지던 나는 마침내 공연이 끝나자 서럽게 앙앙 울었다, 사실 나도 무대에 서고 싶었는데.


     지금도 무대에 대한 미련은 여전하다. 다만 그 시절과의 차이점은, 무대에 오르라는 행운이 서른 목전에선 저절로 찾아오지 않는다. 아무리 열심히 프로필을 돌려봐야 서류에서 광탈하는 현실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합창단과 관현악단 등 크고 작은 무대에 선 경험은 많았다. 독창이든 합창이든 기악이든 연기든 매번 무대에 설 때마다 엄청나게 긴장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마저도 즐거웠다. 마침내 배우 지망생이 되기로 결심한 이후 관중의 이목은 부담스러우면서도 짜릿하고 전율마저 일었다. 학교에서 연극 워크숍을 비롯해 3년 전에 입봉한 이래 공연한 5편의 아동극에서 나는 미친 듯이 무대 위를 뛰어다녔다. 땀을 한 바가지 흘리던, 세트에 튀어나온 못등에 긁혀 피 철철 흘리던, 상수와 하수를 오가며 숨 가쁘게 의상 체인지를 하느라 훌렁훌렁 벗어젖혀도 누가 보건 말건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망아지처럼 들떴다.


     그 이유가 극 중 인물을 내 몸으로 선보여선지 아니면 내 안의 감춰진 면모를 극 중 인물로서 선보여선지 콕 집어서 분간하긴 어렵지만. 확실한 건 무대에서 배우로 서는 것은 기쁘든 슬프든 정신없든 지루하든 괴롭든 행복하든 하여튼 이유 불문하고 그냥 재밌다.


    특히나 상대 배우와의 합, 조명, 음악, 관객 호응 등 외적 요인과 배우의 신체 컨디션 등 내적 요인이 최적의 상태로 조합을 이루면 공연 내내 굉장한 시너지 효과를 얻는다. 원로배우 박정자 선생님의 강연 중 호쾌했던 한 마디에가 귀에 쏙 꽂혔다, *"연극은 라이브예요. 그리고 그건 영원히 아날로그예요. 무대에서 직접 관객하고 만나는 게 연극이거든요." 내가 무대를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다. 현장성. 고정되지 않고 흘러가는 순간의 생생함. 모든 배우와 스태프들이 기계가 아닌 사람인지라 날마다 다르다. 늘 예기치 못한 심경의 변화와 일촉즉발의 돌발상황은 빼놓을 수 없는 공연만의 특색이다.


     또한 관객으로 하여금 극에 몰입을 유도하는 배우 또한 극 중 인물로서 극에 몰입한다. 극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지향하고자 더불어 호흡한다. 제한된 공간에서 시공을 초월한다. 허상 속 진실, 공허 속 충만. 극이 진행되는 동안 무대에서 연기(演技)는 배우의 육신을 빌어 연기(煙氣)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이렇듯 나는 겉핥기로 연기를 배웠고 애매하게 무대를 겪은 바람에 공백기가 길어질수록 갈증은 커져간다.


    곧 데뷔 60주년을 앞두신 박정자 선생님의 인터뷰마다 빠짐없이 나오는 공통적인 질문은 '포기하고 싶을 때나 열정이 사그라졌을 때 어떻게 극복하셨냐'였다. 아직 정극에 발도 못 디딘 나 따위 애송이에게 발언권이 주어진다면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어떻게 하면 연극 무대에 데뷔할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도둑놈 심보일까? 그럼에도 미치도록 궁금하다. 첫 단추를 대체 어떻게 끼우는 걸까. 물론 나는 이미 가정을 꾸려 자식까지 여럿 뒀으니 남들보다 더한 가시밭길에 내던져졌다(엄밀히는 제 발로 들어섰다). 그럼에도 역시 애매한 발 담그기가 아닌 분명한 시작이 간절하다. 이제 와서 발을 빼기엔 무대를 애매하게 경험해버렸다. 나는 배우라고 하기도 애매한 배우 지망생이다.


    내 인생은, 아니 존재 자체로 애매하다. 감정도, 재능도, 대인관계도. 아마도 대다수의 고민거리일 테지만 좌우지간 나는 최악은 면하더라도 통상적인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 엄마는 평소에 무색무취였다가 만나는 사람과 맞닥뜨린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당신을 곧 물에 비유하곤 했다. 나는 그 비유가 왠지 마음에 들었다. 애매한 나 자신이야말로 물처럼 여겨진 까닭에, 어쩌면 나는 배우로서 여러 인물을 소화하는데 적합하리라고 섣불리 확신했다. 실제로 만나는 입시 선생님들마다 나더러 '생긴 게 애매하다'라고 표현하셨으니 아주 틀리진 않았다. 그러나 이미지와 연기는 전혀 다른 문제다.


    실연할 때마다 '에고(Ego)를 깨고 나오라'는 코멘트를 숱하게 들어왔다. 새는 알을 깨뜨리고 나오는데 나는 아무리 연기를 연습해도 에고를 깨고 나오지 못했다. 어느 한 곳에 고인 물이 되지 말자며 편견을 경계해왔음에도 에고의 개념은 너무나 모호했는데, 근래에서야 슬그머니 고개 드는 의문이다. 결국 나 자신이 애매한 까닭에 그놈의 에고를 가늠조차 못한 게 아닐까, 하고. 연기를 위해 인물의 삶을 분석하면서 정작 내 삶을 위해 자신에 대한 분석은 등한시한 것이다.


    지금껏 깨진 독에 물 붓듯이 공백의 틈바구니로 시간만 줄줄 샜다. 조바심 내며 욕심만 앞선다 한들 결국 달라지지 않는 현실이지만, *거창하지 않더라도 꿈을 가지며 살라는 박정자 선생님의 말씀에 가슴 깊이 파묻혀있던 불씨를 다시금 지핀다. 애매한 지금의 내가 분명한 무대를 찾아갈 때까지 보다 냉철하게 자신을 분석하며 내실을 다지는 시간을 갖기로 한다.


     양 손에 무엇 하나 쥐어지지 않아 두렵지만, 애매하게 발 담근 이 곳이 새 출발을 위한 전환점이라고 발상을 전환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달리 성장이고 원숙일까. 개구리는 도약 전에 몸을 한껏 웅크린다. 복잡 미묘한 인생인들 어떠랴. 어딜 가나 사람살이 다 비슷비슷하다는 속언처럼, 무대에서 펼쳐지는 연극 또한 결국 사람살이인 것을.


    그래, *심플하게 가자, 심플하게. 애매했던 20대에서 퇴장하고 나면 곧 개막을 앞둔 30대는 나의 분명한 무대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역시 이 바닥은 존버가 답이다... 애송이의 저급한 표현 대신 연륜이 가득 담긴 박정자 선생님의 고급스러운 목소리와 말씀으로 갈무리하겠다. *"참는 것, 기다리는 것. 연극은 그런 거예요."



* 박정자 선생님 인터뷰 영상서 인용했다. 이하 해당 링크.

KTV 문화다큐 특별한 만남 | 연극배우 박정자

광주 MBC 위대한 강연 | 다산강좌 / 연극배우 박정자

KTV 현장다큐 문화 행복시대 | 대한민국 연극계의 살아있는 전설, 박정자

EBS 초대석 | 무대는 나의 존재 이유 / 연극배우 박정자 #1

EBS 초대석 | 무대는 나의 존재 이유 / 연극배우 박정자 #2




    우연히 유튜브에서 박정자 선생님의 강연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유튜브의 알고리즘을 타고 돌아다니며 그녀의 인터뷰 영상 여러 편을 더 찾아봤다.


출처 - 유튜브 KTV 현장다큐 문화 행복시대 | 대한민국 연극계의 살아있는 전설, 박정자


    일전에 언급한 바 있는, 재수생 시절에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보러 다닌 여러 공연 중 재단 법인 국립극단 창단 공연인 <오이디푸스>에서 박정자 선생님의 무대 실황을 직접 관람했다. 그리 길지 않은 대사임에도 전해지는 아우라란, 뭣도 모르는 지망생에게도 그 여운은 이루 형용할 수 없다. 9년 전의 나는 정말이지 행운아였다.


출처 - 유튜브 EBS 초대석 | 무대는 나의 존재 이유 / 연극배우 박정자 #2


    그러니 인터뷰 동영상으로 접했을 때는 또 다르지만, 이건 이대로 감탄이 절로 나는 것이다. 구구절절 마음을 울리니 이것이 바로 소위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인가 싶었다. 매력적인 보이스로나, 끝내주는 화술로나,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난 플렉스로나. 이분은 천상 배우이시구나. 심지어 가창력마저 걸출하시다.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끼로 다져진 그녀를 보자니 상대적으로 가진 재주라곤 하등 쓸모없는 나 자신이 초라할 지경이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연극이고 미술이고 음악이고 각 분야의 원로 예술가들 중 대다수가 차 한 대는커녕 빵 하나 배불리 먹지 못한다고 한다. 연극계 원로배우인 그녀 역시 해당사항이다. 공연뿐 아니라 매체를 넘나드는 그녀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기에 새삼 충격이었다, 정상의 경지에 이르러도 부의 축적과의 거리가 그냥 먼 것도 아니고 머나멀다니. 그럼에도 배우란 축복받은 직업이고 무대는 숨 쉬는 공기와 같다고 그녀는 말한다. 작년에도, 8년 전에도, 12년 전에도 한결같이 투철한 그녀의 소신이 부러웠다.


출처 - 유튜브 EBS 초대석 | 무대는 나의 존재 이유 / 연극배우 박정자 #2


     지혜와 사랑이 꽉 찬 여든 살이 되어 롤모델인 *모드를 무대에서 연기하길 바라는 그녀. 이미 오랜 세월을 무대에 몸 바쳤어도 늘 현역이고 싶은 그녀. 도전과 꿈을 멈추지 않는 그녀. 기실 타고난 재능뿐만이 아닌 어마어마한 노력과 열정이 시간마다 누적되어 견고해진 내공일 것이다. 그녀는 지금껏 연기해온 수많은 인물만큼이나 다채로웠다. 애매함과 다채로움은 한끝인 듯 천지차이다. 나도 언젠가는 박정자 선생님처럼 나의 무대를 분명하게 찾아가고 싶다.



* Colin Higgings / <19 그리고 80>의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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