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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하 Jan 30. 2021

순백의 비원

천억에 달하는 돈도 그 사람의 시 한 줄만 못해.

    아직 겨울 햇살이 눈부신 한낮, 짬을 내어 가족들과 함께 길상사를 방문했다.


    척박한 시국이라한들 법정 스님이 영면하신 진영각을 향한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자매들이 아빠의 손에 이끌려 생애 처음 와보는 사찰에 호기심을 내비치는 동안 나는 홀로 눈길을 잡아끄는 나무다리 저편을 향해 눈길을 거닐었다.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걸음마다 서걱, 서걱하고 적막 깼다.


    그곳은 1997년 당시 시가 천억에 이르는 서울 3대 고급 요정 중 하나였던 대원각을 수차례 법정스님을 설득한 끝에 시주했다는 길상화의 영정을 모신 작은 평수의 사당과 그녀를 기리는 공덕비가 자리했다, 마하반야바라밀.


    헐벗은 가지마다 백의로 갈아입은 나무 무리와 키 낮은 돌벽으로 둘러싸인 사당터는 사찰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마찬가지로 정갈하고 소박했다. 안내판에는 그녀의 약력 말미에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 1937년 겨울에 쓴 최초의 원문이 기재되어있으므로 처음 보는 누구라도 그 관계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미지 출저 - 길상사 홈페이지


    22년 전 길상화의 육신이 한 줌의 재가 되어 흩어질 적과 마찬가지로 공덕비 위 흰 눈이 푹푹 쌓였다. 흰 눈이 자야를 품고 자야는 백석을 품은 듯 보였다. '천억에 달하는 돈도 그 사람의 시 한 줄만 못하다'는 길상화이자 자야이자 진향이자 김영한인 그녀의 말이 어쩐지 숭고하게 여겨져 자못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를 읊조렸다.


    단출한 사당터 갈피마다 눈 쌓인 돌덩이나 공덕비 앞에 덩그러니 놓인 작은 송이의 추모화유별난 게 없다. 그럼에도 어쩐지 쉬이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나의 짧은 식견으로는 감히 이 감성을 표현할 길이 없다. 다만 굴곡 많던 삶에 흰 눈이 푹푹 나리기를 바라 마지않던, 그토록 절절하고 오랜 염원은 시간이 흘러 그녀가 영면에 든 자리 언저리에 선 나에게까지 고조곤히 전해진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걸음 소리는 진작 끊겼고 남모르게 1조 9천억 원짜리 시의 낭송도 마치자 순백의 비원이 깃든 사찰 풍경 속에서 풍경만이 바람결에 청아하게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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