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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섬을 탈출하다

아이와 유럽 고난 여행기 8편

by 이해의선물


아침 일찍 서둘렀다.

숙소를 정리하고 아침식사를 하러 나왔다.

전날 보아둔 식당에서 잉글리쉬 블랙퍼스트를 먹고

가는 게 사실상 런던 여행에서 마지막 일정이라면 일정이었다.

기대와 달리 그 식당은 성의도 없고, 맛도 없었다.


내가 몇장의 사진을 찍자 SNS를 하는지 물었고

브런치와 블로그를 한다고 대답했다.

용감하게도 식당 주인은 친절하게 명함을 건네며

트립어드바이저에 리뷰를 남겨줄 것을 부탁했고 나는 그러겠노라고 약속했다.


영국 여행의 마지막 식사이자 일정이었기에 실망했고 구글 평점에 배신당한 나는 별점 1개를 주는 것으로

리뷰를 남기겠다는 약속을 솔직하고 성실하게 이행했다.


그리곤다친 손으로 계단으로 캐리어 두 개를 들고 오르내려야하는 불편함을 겪느니 그냥 유스턴 역에서 걸어서 세인트 판크라스 역까지 갔다.


런던의 8월 아침은 그날도 선선했다.

기차를 확인했다.

타야 할 기차는 런던-암스테르담 행 11시 4분 유로스타였다.

전광판을 확인한 나는 소리를 지를뻔 했다. 유로스타는 암스테르담까지 직행, 논스톱이 아닌 릴, 브뤼셀, 로테르담까지 세 곳이나 정차하는 기차였다. 직원에게 한번 더 기차의 정차역을 확인했고,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 나는 암스테르담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요크에서 돌아오는 두 시간 동안 지도를 펴서 살펴보았고 암스테르담에서 유레일 패스를 이용해 좌석 예약 없이 갈 수 있는 곳은 프랑크푸르트, 룩셈부르크, 베를린, 쾰른 정도였다.


여행의 다음 목적지는 스위스 브베였기에 프랑크푸르트, 룩셈부르크, 베를린, 쾰른에서 1박을 하고 브베까지 가는 것은 2일을 이동에 날려 먹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고된 장거리 이동으로.


프랑크푸르트와 룩셈부르크와 쾰른에서는 별로 할 게 없었고, 베를린까지 가는 것은 스위스 다음 목적지인 베네치아까지 포기해야 하는 루트였다. 그래서 런던에서 하루에 이동할 수 있는 최대한의 남쪽거리이면서 스위스를 포기하는 대신 2박 하면서 둘러볼 수 있는 도시가 있는 곳이어야 했다.


그렇게 낙점한 곳이 바로 뉘른베르크였다.뉘른베르크에서는 밤베르크와 로텐부르크를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세인트판크라스역에서 유로스타를 타려는 사람은 상상 이상으로 많았다.기차 탑승줄은 끝이 어딘지 모를만큼 길었고 대기줄이 길기로 에버랜드 티익스프레스 탑승 줄도 악명 높은데 그 줄보다 족히 두 배는 길어보였다. 탑승줄이 워낙 길다보니 국적을 알 수 없지만 다양한 인종들의 새치기마저 횡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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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판크라스역에 도착해서 줄 서서 유로스타 탑승까지 정확히 1시간 20분이 걸렸다.

런던으로 오는 비행기를 인천공항에서 탑승 수속하는데 20~30분이 안 걸렸었는데. 떠나는 이들의 기다림, 기쁨과 불안이 뭉쳐지고 범벅된 공기가 이 길고 긴 행렬위로 흐르고 있었고, 탑승마감으로 이 줄 어딘가가 끊어지면 비명이 따귀를 때릴 것 같은 인간띠를 보며 내가 왜 유로스타 표를 구할 수 없었는지 실감했고 나의 이 대책없음은 얼마나 무모했고, 현실에 무감한 짓이었는지

그리고 이 행운에 얼마나 더 깊은 감사를 드려야 하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비행기를 타고 나가는 것과 똑같은 절차를 밟았지만,

유로스타 기차표는 탑승 가능 여부를 확인하는 용도로 그 쓰임이 한정되었기에 표에 누구의 이름이 쓰여 있는지를 걱정하며 혹여 탑승이 거절될까 마음 졸인 나의 걱정은 기우가 되었다.



여권에 출국자용 검은색 도장을 받자 안도감이 몸을 내리 눌러 주저앉아버릴 것 같았다.

잠시 뒤 탑승장의 문이 개방되고 플랫폼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이 때 나의 심정을 말하자면

감옥을 출소하는 제소자, 군대 제대하는 날 위병소를

나서는 군인의 그 어떤 심정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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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스타 기차에 탑승하자마자 암스테르담에서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이체 열차표를 지우고 브뤼셀에서 프랑크푸르트, 프랑크푸르트에서 뮌헨으로 가는 열차를 새로 검색해서 탑승 일정에 넣어두었다.


기차는 끊임없이 시속 250km 가 넘는 속도로 도버해협을 지나 릴에 도착했고,

10분 지연 출발한 유로스타는 벨기에 브뤼셀 미디역에 정확한 시간에 도착했다.

미디역에 내려 서둘러 브뤼셀 남역으로 향하는 이체

기차 기차가 서 있는 플랫폼을 찾아야했다.




주어진 시간은 7분.


아무리 찾아도 우리가 타야 할 기차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으로 뒤엉킨 플랫폼에서 이체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이 기차를 타는 게 맞다고 했다.


독일 고속열차 이체ICE를 타자마자 문이 닫혔고

미끄러지듯 기차는 출발했다.

유로스타가 1분만 늦었거나,

내가 플랫폼에서 1분만 더 헤맸다면,

이 기차는 놓쳤겠지.. 또 다시 오늘도 소름이 돋았다.



2016년 첫 유럽 여행 때 들렀던

그 크기와 어두운 색깔만으로 압도되었던 쾰른 대성당을 기차는 무심히 지났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기에 카메라를 이리저리 돌려보았지만 그 크기와 위압감 넘치는 색감 어떤 것도 카메라에 건져올리지 못했다.


기차가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하자 우리는 내렸다. 2019년 7월에 도착했던 장소에 이렇게 예정되지 않은 방문처럼 다시 오게 되었다. 아이와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공항 구경도 하고 여기에 내렸던 일들을 추억처럼 꺼내며 한바퀴 돌았다.


사실 이 때만해도 아이는 집에 가고 싶다고 했고, 인천에서 출발한 아시아나항공이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할 시간이었으므로 그 비행기라도 보고 싶다 했기에 혹시라도 Arrival 전광판에 뜬

아시아나항공 이름표라도 보려고 공항 구경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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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으로 가는 이체 기차는 20분 이상 지연되었고

독일의 여름은 폭염이었다. 함께 지연되었던 스위스

바젤로 떠나는 기차마저 떠났지만

앉을 자리 하나 없는 플랫폼에서 여름 더위와 기차가 늦어지는 초조함에 점점 지쳐갈 즈음

기차가 도착했다.


프랑크푸르트의 상징과 같은 마천루들이 보인다.

아이와 2019년 7월에 저길 걸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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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에서 뒤셀도르프, 쾰른, 뷔르츠부르크를 거쳐 뉘른베르크에는 밤 9시 5분 도착이었다.


암스테르담에서 출발했다면 뉘른베르크에 밤 11시 10분 도착이었다.

나는 숙소에 그 늦은 시간에도 체크인이 가능한지를

물었고, 12시가 넘어갈 경우 레이트 체크인 수수료

30유로를 물린다는 답을 보내왔다.


2018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악몽이 떠올랐다.

모스크바에서의 비행기 지연이 원인이었지만 늦은 시간 체크인을 이유로 무려 하루치 숙박비를

벌금으로 요구받고 꼼짝없이 내 줄 수 밖에 없었던 일 말이다.


그래서 암스테르담이 아닌 벨기에서 출발하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런데 기차는 자꾸 지연된다.

5분... 10분... 20분....


진연둣빛 잎이 늘어선 포도밭 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마인강을 옆으로 둔 뷔르츠부르크(독일어 발음은 "블츄부악"으로 들렸다.)에서 기차는 그대로 정차해 버렸다.


이러다 또 레이트 체크인 벌금 물겠구나....

오늘도 1일 1고난은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겠구나 ...

하는 걱정과 불안에 휩싸일 즈음

기차가 뉘른베르크에 도착한다는 알림 방송이 나왔고

그 시각이 밤 10시 15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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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50만의 도시인 뉘른베르크에서는

무려 3개의 지하철 노선이 흐른다.

뉘른베르크 중앙역에서 2정거장 거리의 숙소로 가는

텅텅 빈 지하철을 보며 복지의 나라 독일에 왔으면서도

이렇게 사람이 없어서 어떻게 운영하나 하는

기업 이익 중심인 한국적 사고방식이 먼저 작동했다.


숙소에 도착했다.

다행히도 새로 지은 숙소는 넓고 넓었고,

깨끗하고 또 깨끗했고 싱글 침대 두개는 푹신하고 푹신했다.


그렇게 아홉시간의 기차 이동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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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릴 - 브뤼셀을 거쳐 -쾰른 - 프랑크푸르트 - 뉘른베르크까지 무려 9시간의 기차 이동.

도대체 이 거리가 얼마쯤인지 가늠이 되지 않아

같은 축척으로 지도를 옮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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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동한 거리는

기차를 타고 북경에서 서울까지 오는 거리였다.


하... 오늘 참 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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