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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의선물 Aug 31. 2020

학원을 끊고 유럽을 걷다(2.아이와 여행 준비하기)

- 3. 아이와 유럽 여행에서 꼭 챙겨야 할 예상외의 준비(물)들

 “이렇게 단출해도 되나?”


 세 번째인가, 네 번째인가. 여행 떠나기 전날, 싸 놓은 캐리어를 보면서 했던 말이다. 아이와 여행하려면 어른끼리 여행하는 것보다 세심한 준비가 필요하다. 경험상 아이와의 여행 준비는 챙겨야 할 물건보다 더 중요한 준비도 있다. 조금 귀찮더라도 꼼꼼하게 준비해가면 아이와 여행을 ‘잘’ 할 수 있고, 다음 여행을 다시 감행(?)할 가능성이 훨씬 높아지기 때문이다.


 유럽의 날씨는 변화무쌍하므로 아이의 옷은 가급적 여러 벌 챙겨가는 게 좋다. 특히, 일교차가 큰 여름엔 긴소매 셔츠와 가벼운 패딩 하나는 꼭 챙겨가야 한다. 밤9시까지 이어지는 여름의 낮엔 태양의 열기에 숨이 막히지만, 해가 지면 금세 추워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8월 암스테르담에서 입김이 나올 정도의 아침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잔세스칸스로 가서 풍차를 봤었고, 뉘른베르크에서는 여름에 패딩을 사 입히기도 했었다. 또한,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의 경우 남부와 북부의 기온차가 크다. 세비야는 따뜻했지만 마드리드는 정말 추웠고, 로마는 따뜻했지만 밀라노는 얼어 죽을 만큼 추웠다. 여건이 된다면, 캐리어에 들어갈 얇은 전기장판 하나는 넣어가길 권한다.


 아이가 아무거나 잘 먹는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아침으로 먹을 수 있는 한국 음식을 챙겨 가는 것이 좋다. 유럽은 대부분 일주일이 넘는 일정으로 다녀오는데, 그 긴 시간동안 아이가 먹는 걸로 힘들게 한다면 여행이 아니라 고행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는 캔에 든 여행용 반찬이나 누룽지와 밥, 간편한 국이나 김치같은 것들을 잘 먹었다. 한국에 있을 때 김치를 잘 안 먹는 아이도 유럽에 가면 김치를 잘 먹게 된다. 정말 희한한 일이다. 아침을 한식으로 먹고 나서면 하루의 여행이 아이에게도 든든해진다.


 그 외에도 돗자리는 꼭 가져가야 한다. 유럽은 공원도 많고 길거리에 앉거나 누워서 쉴 수 있는 공간이 많다. 여행하다가 지치면 그때마다 매번 카페를 찾아갈 수는 없다. 그럴 때 돗자리만 있다면 뮌헨의 영국정원이나 프라하의 섬, 런던 하이드파크에 누워 아이와 이야기 하며 아이스크림, 커피, 과자를 먹을 수 있고, 책도 볼 수 있다.

심지어 낮잠도 잘 수 있다. 스위스나 오스트리아의 그림 같은 초원에 차를 세우고 돗자리를 깐 뒤, COOP에서 사온 빵과 간식을 먹은 적이 있는데. 그 장면은 아이가 유럽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중 하나로 꼽고 있다. 챙겨가야 할 물건 중에서 잘 모르는 부분이 신발이다. 매일 매일 오래, 많이 걸어야 하기 때문에 아이 발에 정말 잘 맞는 편한 신발을 잘 골라서 가야 한다. 오래 걷다보면 아이가 발가락이나 발바닥이 아파서 못 걷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기 전 아이의 발을 잘 살펴봐야 한다. 엄지발가락이나 새끼 발가락이 겹쳐져 오래 걸으면 아픈 아이일 경우 실리콘으로 된 발가락 교정기를 챙겨 가야한다.     

 지금까지는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이었다면 이제 아이와 더 잘 여행하기 위한 또 다른 준비를 해야 한다. 아이와 함께 여행 갈 나라의 언어와 그 도시에 대한 공부를 하는 것이다. 기본적인 회화 대여섯마디를 아이와 함께 공부해가면 아이도 훨씬 그 도시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얼마예요?’ 등 현지 시장이나, 가게, 숙소에서 쉽게 할 수 있는 말을 찾아서 아이와 미리 공부해보자.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승무원에게 혹은 입국심사를 하는 심사관에게 하면서 연습해 볼 수도 있다. 어쩌면 나보다 아이가 먼저 그 말을 현지인에게 할지도 모른다. 아이가 붙임성이 좋은 것 같아도 막상 나가보면 ‘얘가 왜 이렇게 쑥스러움을 타지’ 싶을 정도로 현지인과 대화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아이가 그 나라 말을 조금이라도 할 줄 안다면 여행의 즐거움은 두배가 될 것이다. 여행을 다녀 온 후 우리 아이가 제일 많이 따라 한 건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지하철과 트램, 버스에 나오는 안내 방송이었다. 나는 한마디조차 기억나지 않았던 말이다. 그걸 깔깔거리고 흉내내면서 아이는 여행의 공간과 시간을 기억했다. 우리의 생각보다 아이들의 외국어로 말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언어 습득력은 더 뛰어날지도 모른다.


 쿠키런이라는 만화가 있다. 도시의 잘 알려진 명소들을 돌면서 탐정이야기처럼 되어 있는 만화인데 아이가 참 좋아했다. 아이에게 여행 책이나 도시를 여행한 블로그는 글자도 작고 어렵고 재미가 없다. 큰 도시라면 이런 만화를 통해서도 아이가 미리 그 도시를 여행해 보는 것도 좋다. 여행하기 전에 로마, 런던, 부다페스트, 파리, 마드리드, 피렌체 등의 도시를 이 책으로 보면서 그 도시의 명소가 어딘지 함께 알아보았다. 만화에서 본 곳이 나올때면 아이의 목소리가 커지고 발을 옮기는 동작의 속도도 빨라졌다.


 미술관도 마찬가지이다. 아이와 처음 간 미술관이 암스테르담의 고흐 박물관과 루브르였다. 입장한지 1시간을 넘기기 어려웠다. 고흐미술관에서는 고흐의 자화상과 해바라기(아이 피아노 학원에 걸려 있었나보다) 루브르에서는 모나리자를 보고서는 “빨리 나가자”였다. 아이의 찡찡거림에 빨리 보고 나가야한다는 압박감과 미술관 안에 몰린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나도 여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보고 싶던 명화 앞에서 앉아서 그림만 바라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던 아이한테서 가장 최근에 다녀왔던 뮌헨 알테피나코텍에서 “아빠, 그림을 좀 꼼꼼히 봐”라는 소리를 들었다. 하하하하 ‘그 동안의 유럽 여행이 헛되지 않았구나’ 싶어서 듣기 좋은 잔소리였다.

 미술관에는 아이도 보고 싶은 그림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아이도 그림을 찾아다닌다. 유명한 미술관들은 워낙 넓어서 탐험을 좋아하는 아이라면 미로 찾듯 그림을 찾아가는 재미도 맛볼 수 있다. 그럴려면 아이가 보고 싶어하도록 평소에 그림을 보여주면 된다. 나는 아이에게 어린이 잡지를 정기구독하게 했다. 잡지에서 매달 명화를 소개하는 코너가 있었고, 아이는 잡지에서 봤던 그림을 찾아서 빨리 보고 싶어 했고, 그 그림에 대한 설명까지 해 주었다. 또 평소에 유명한 그림들에 대한 정보를 아이 눈높이에 맞춰서 아빠가 제공해 줄 수도 있다. ‘꾸안꾸’라는 말이 유행이다. 그림 이야기도 그렇게 하면 된다. 지식 공부하듯 하는 것이 아니라 청소하면서, 설거지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림이나 화가 이야기를 갖다 붙이는 것이다. 카라바조의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이나 램브란트의 야간순찰, 부셰의 마담 드 퐁파두르 같은 그림은 아이에게 이야기 해 주기 좋은 소재이다. 미술관마다 꼭 있는 수태고지(성모희보)도 아이와 이야기 해 보고 좋은 그림이다. 어린이 미술 동화책 시리즈도 아이가 명화를 접해보기 좋은 기회가 된다. 도서관의 어린이 코너에 가면 시리즈가 있어서 매주 두 권씩 그림책 보듯 읽어보면 아이와 하는 유럽 미술관 여행은 아빠도 편안하고 아이도 지루하지 않은 여행이 될 수 있다. 


 그 외에도 유럽 여행중에는 아이가 좋아하는 다양한 액티비티 체험이 있다. 패러글라이딩이나 짚라인, 트로티바이크, 호수 보트 운전하기 등 국내 여행에서 즐길 수 있는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스케일의 체험이 있는데 아이가 이런 것들을 좋아하는지 성향을 잘 파악해서 가면 여행 중간 중간 아이가 좋아하는 활동을 넣을 수 있다. 이렇게 구성하면 아이도 즐거운 여행이 되고 부모와 아이가 함께 하는 추억이 두 배로 남는 여행을 만들 수 있다.  내 아이가 자동차나 축구를 좋아하는지 레고나 예쁜 박물관을 좋아하는지에 따라서 여행 동선이 달라질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아이와의 여행에서 꼭 챙겨가라고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아이 전용 카메라와 일기장이나 책이다. 대개 부모는 아이와의 여행에서 아이 사진을 찍어주느라 아이한테 “여기 서봐.” “저기 서봐. 이쁘다. 사진찍자” 하게 된다. 처음 며칠간은 순순히 따라주던 아이도 시간이 지나면서 짜증을 부리기 시작한다. “사진 또 찍어? 많이 찍었잖아!” 한다. 부모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장면과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장면이지 아이한테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21일 여행의 마지막 날, 부다페스트의 황금빛 물결이 흐르는 일몰 햇살을 배경으로 사진 찍을 때 울것처럼 신경질을 내던 아이. 그리고 로마 벼룩 시장에서 그 무거운 DSLR 카메라를 들고 노점 빵집 사진을 찍던 아이 모습이 함께 떠오른다. 아이는 아이의 눈이 있고, 아이도 아이가 찍고 싶은 순간과 장면이 있다. 부모의 시선이 아이와 다르고 우리가 놓치는 장면을 아이가 보기도 한다. 또 아이는 자기가 찍은 사진을 훨씬 더 주의깊게 보고 그 순간을 오래 기억한다.


 아이에게도 아이만이 쓸 수 있는 카메라를 쥐어주자. 경험상 휴대폰 카메라보다는 미러리스 디지털 카메라나 DSLR 카메라로 찍는 걸 더 좋아했다. 휴대폰을 소지하게 되면 아이가 핸드폰에 더 집중하게 된다. 휴대폰을 잃어버린채로 여행 다녔던 취리와 루체른, 바르셀로나는 지금도 내 기억속에 더 선명하다. 휴대폰 없이, 사진 찍는 행위 없이, 오롯이 눈과 발로만 다녔던 그 여행의 기억이 강렬했고 그때 다녔던 여행지와 맛집들은 지금도 쉽게 찾아갈 수 있을 것 같다. 검색을 통한 기억력은 순간 집중력은 높이지만 장기 기억력을 약화시킨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래서 휴대폰 카메라 대신 저렴하고 가벼운 렌즈가 끼워진 카메라를 아이에게 하나 선물하자. 여행의 처음부터 아이가 사용하게 해 보면 어떨까? 비행기 타는 순간부터 한국으로 돌아와 인천 공항에 내리는 순간까지 아이는 자기만의 여행을 기록하게 될 것이고 눈과 발로 다닌 여행의 날들만큼 여행의 기억이 오래 남을 것이다. 

 긴 시간 여행을 하다보면 쉬어 가야 할 때가 있다. 여행 후반부로 갈수록 부모도 아이도 체력이 달려 지쳐간다. 하루에 소화할 수 있는 일정이 줄어들기도 한다. 여행 동선이나 스케줄, 여비의 사정상 처음 여행을 계획한 일정을 소화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날씨도 변수다. 겨울 유럽은 비가 자주 오고, 유럽의 여름 더위는 생각보다 엄청나다. 부다페스트의 여름 더위에 지쳐 부다아이 아래 공원 광장에서 돗자리를 깔고 낮잠을 자며 쉬었던 기억이 있다. 런던의 짧은 겨울해는 오후 4시 반인데도 어둑어둑해졌다. 가로등이 다 켜진 밤 같은 시간에 런던 애프터 눈티를 즐기게 했고, 아이와 약속한 하이드파크 산책을 할 수 없었다. 그럴 때 생기는 빈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이 휴식이다. 무엇을 하면서 휴식할 것인가. 부모는 새로운 여행 스케줄을 작성하거나 수정한다. 여행에 관련된 정보를 검색하거나 쉴 수 있는 카페나 공원을 찾아보기도 한다. 그 시간에 아이는 무엇을 하게 할 것인가. 일기장과 책이다. 여행 기록을 블로그에 연재하듯 순서대로 써 나가면서 기록과 함께 되돌아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기록을 하면 여행을 세 번 하는 느낌이다. 내 발로 직접 다녀온 여행 한번. 사진을 정리하고 글을 쓰면서 또 한번. 그리고 가끔 다시 그 기록을 들춰보면서 또 한번.


 아이도 아이의 여행을 남기도록 하면 어떨까? 아이들의 일기란 대체로 그렇다. 오늘은 뭐뭐 했고. 어딜 어딜 갔고. 예를 들면 이렇다.     


 "오늘은 기차를 타고 성을 보러 갔다. 기차는 2층 기차였다. 성은 멋졌다. 성을 내려와서 스테이크를 먹었다. 맛있었다. 참 즐거웠다. 내일은 어디로 여행하는걸까."


  여기에서 아이와 아빠가 조금 더 시간 기록을 늘려주면 된다. 아이가 중간 중간 빼 먹었던 공간과 시간들을 떠 올려주면 아이의 일기는 두 배 세 배 더 알찬 일기로 치밀해진다. 거기에 더해 아이가 찍은 사진들을 보면서 기록하면 훨씬 더 풍성한 아이 여행 일기가 만들어진다. 아이의 여행 기록은 아이를 나보다 훌륭한 여행가로 만들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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