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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사랑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나눔윤리학을 공부하며

by 민창

목차

1.한국교회에 침투한 ‘자본주의식’ 나누기

2.나눔이란 무엇인가?

3.나누기(정의)와 나눔(사랑)에 대한 차이점

4.성경은 나눔을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5.오늘날 나눔은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가

6.맺는글



1. 한국 교회에 침투한 '자본주의식'나누기

오늘날 우리는 ‘나눔’이라는 말을 흔히 접한다. 방송에서는 나눔 캠페인이 진행되고, 기업은 사회적 책임이라는 이름 아래 기부와 봉사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렇게 익숙해진 ‘나눔’이라는 개념은 과연 본래의 의미대로 이해되고, 실천되고 있는가? 현대 사회는 성과와 효율, 경쟁과 거래 중심의 구조 속에 놓여 있다. 이런 환경에서 나눔은 종종 ‘이익이 남는 선택’이나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는 대상에게 제공되는 조건부 자선’으로 왜곡되곤 한다. 자선과 기부는 때로 도덕적 우월감의 수단으로 소비되며, 진정한 관계를 맺기보다는 오히려 선을 긋고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기능할 때가 많다. 나눔은 어느새 계산되고 조건화된 행위로 전락해버렸다. 이처럼 나눔이 조건화된 사회 속에서, 한국교회는 과연 이웃 사랑의 실천자로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 기독교는 이웃을 위해 자기 몫의 일부를 내어놓는 나눔 윤리를 복음의 본질로 가르쳐 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례없는 속도로 성장한 한국의 대형교회들 안에서는 자본주의식 거래의 논리가 깊숙이 작동하고 있다.1 교회 재정과 관련된 횡령 사건,2 담임목사의 고액 은퇴금,3 세습 문제4 등은 조금만 기사를 검색해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은 결코 외면할 수 없다. 겉으로는 이웃 사랑을 외치며 나눔을 강조하지만, 실상은 부의 세습과 권력의 유지를 위해 ‘몫’을 따지는 자본주의식 나누기가 교회 안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 한국교회는 복음의 본질과 나눔의 윤리를 근본적으로 다시 성찰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기독교 윤리의 시선으로 나눔의 본래적 의미를 되짚고자 한다. 나눔은 단순히 물질을 나누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 방식이며 공동체를 세우는 윤리적 실천이다.


1) 김혜령, 『기독교 시민교양을 위한 나눔 윤리학』(서울: 잉클링즈, 2022). 54-57.

2) 뉴스앤조이, “6년간 30억 원 횡령한 재정집사, 교회는 왜 몰랐나,” 뉴스앤조이, 2022년 10월 5일,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4980.

3) 뉴스앤조이, “목사 은퇴 예우금 문제로 쑥대밭 된 교회,” 뉴스앤조이, 2018년 3월 7일,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9198.

4) 표성중, “번영신학, 교회 비도덕화 가속시켜 공신력 붕괴,” 아이굿뉴스, 2012년 1월 17일, https://www.igood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33562.




2. 나눔이란, 무엇인가?

현대 사회는 나눔 보다는 거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행동이 이익이 되는지, 어떤 선택이 손해인지 계산하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나눔 역시 이윤의 논리 안에 갇히면서 ‘기부’나 ‘자선’처럼 자발성과 의무 사이에서 흔들리곤한다. 나눔보다 거래가 익숙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프랑스의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Marcel Mauss)는 나눔을 자세히 설명한다. 그는 1925년 『증여론(Essai sur ledon)』에서 이렇게 묻는다. “왜 사람들은 선물을 주는가?” 모스는 고대 사회와 원주민 공동체를 분석하면서, 선물이 단순한 무상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선물은 주고, 받고, 되갚는 ‘의무’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해, 선물은 도덕적 책임이 깃든 사회적 행위이며, 공동체를 지속시키는 숨겨진 윤리의 장치라는 것이다. 이 관점은 오늘날의 나눔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기초가 되어준다. 나눔은 ‘주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뜻을 넘어, 왜 나눔이 도덕인지, 나눔이 어떻게 공동체를 유지하는 힘이 되는지를 이야기한다. 선물은 혼자서는 완성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주어야 하고, 받아야 하며, 되돌려야 한다. 이 주고받음의 연쇄 속에서 인간은 서로를 인식하고, 신뢰를 쌓으며, 공동체를 형성한다. 나눔윤리학은 바로 이 관계성에서 윤리의 기초를 찾는다. 우리는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윤리적인 인간이 된다. 선물은 이 빚짐을 가시화하는 행위다. 선물은 자발적으로 주어지지만, 동시에 받은 사람은 되돌려야 할 도덕적 압력을 느낀다. 이 구조는 나눔이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책무로 작동한다는 점을 보여준다.5 나눔은 인간의 삶을 고립된 존재가 아닌, 타자와의 상호의존적 삶으로 이해하며, 그 안에서 나눔을 윤리적 실천으로 해석한다. 마르셀 모스는 선물의 역사를 통해 인간 사회의 윤리적 기초를 되묻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통찰 속에서 깨닫게 된다. 나눔은 단순한 덕목이 아니라, 인간 사이의 신뢰를 회복하고 공동체를 회복하는 윤리적 실천이라는 것을. 나눔윤리학은 바로 이러한 선물의 윤리를 오늘날 다시 새롭게 호출하며, ‘함께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 결국 나눔 윤리학에서 나눔의 동기는 분명히 ‘사랑’이어야한다. 사랑으로 내 몫을 남에게 값없이 주는 것, 그것이 나눔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나누는 값없는 사랑을 통해 관계가 형성되고, 도덕적 책임감을 부여하며, 인간 사이의 신뢰를 만들어 나간다.


5) 김현자,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 『인문논총』 제68집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2012), 495-508.




3.나누기(정의)와 나눔(사랑)에 대한 차이점

우리는 흔히 ‘나누다’라는 말을 사용할 때 특별한 구분 없이 말하곤 한다. 누군가에게 물건을 주거나, 재정을 도우며 “이웃과 나눴다”고 말하지만, 그 나눔이 사랑의 실천인지, 아니면 정의로운 분배인지를 구분하지 않고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윤리학적으로 이 둘은 전혀 다른 영역의 행위로, 때로는 그 구분이 도덕적 책임의 경계를 결정짓는 핵심이 되기도 한다. ‘나눔’은 흔히 사랑의 윤리로 분류된다. 이때의 사랑은 감정적이거나 조건 없는 헌신을 전제로 하며, 기독교 전통에서 말하는 아가페적 사랑을 중심으로 한다. 나누는 사람의 자발적인 결단, 선의, 혹은 동정심에서 비롯된 나눔은 수혜자의 자격이나 형편을 따지지 않는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고, 심지어 상대방이 그것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더라도 베푸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런 조건 없이 세상에 오셨듯, 사랑의 나눔은 선행적이고 헌신적이다.


반면, ‘나누기’는 정의의 윤리에 해당한다. 여기서 중심은 감정이 아니라 ‘공정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분배정의’(Distributive Justice)라고 설명하며, 공공 자원이나 사회적 혜택이 어떻게 누구에게 나누어져야 하는지를 따진다. 이 정의는 능력, 필요, 기여도, 자격 등의 객관적 기준을 바탕으로 형성되며,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과 구조적 평등을 목적으로 한다. 정의로운 나누기는 불공정한 편애나 특권을 견제하며, 약자를 위해 체계를 만드는 과정이다.


이 두 개념이 충돌할 때, 종종 혼란과 윤리적 갈등이 발생한다.
사랑의 나눔이 정의 없는 온정주의로 흘러갈 때는, 오히려 불공평한 특혜가 될 수 있다. 반대로 정의의 나누기가 사랑 없는 행정적 분배로만 실현될 때, 인간적인 따뜻함과 관계성이 실종될 위험도 존재한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사회, 특히 교회와 시민사회는 이 두 영역을 조화롭게 이해하고 균형 있게 실천해야 한다.6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동시에 의로우신 분이다. 하나님의 백성 또한 자발적 사랑의 나눔과 구조적 정의의 나누기 사이에서 균형 잡힌 신앙 윤리를 실현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나눔’을 말할 때, 그 동기와 기준이 무엇인지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정의를 세우고, 정의가 견고할수록 사랑이 살아나는 사회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한 조각이 아닐까.


6) 김혜령, 『기독교 시민교양을 위한 나눔 윤리학』(서울: 잉클링즈, 2022). 40-54.




4.성경은 나눔을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서구의 정의론에서 나누기는 흔히 기여도나 미래의 가능성을 기준으로 구성원의 몫을 결정하는 분배의 방식으로 이해되어 왔다. ‘얼마나 기여했는가?’ 또는 ‘기여할 수 있는가?’에 따라 몫을 나누는 것이 공정하다고 여겨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는 철저히 인간의 능력과 효율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그 사회 속에서 기여할 수 없는 사람들은 쉽게 배제의 대상이 된다. 이는 결국 사회적 약자를 더 깊은 소외로 밀어넣는 정의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성서에서 말하는 나눔의 윤리는 이런 정의와 전혀 다르다. 신명기와 레위기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정착 이후 어떻게 땅을 분배받았는지를 보면, 땅은 여러 이유로 매매되기도 했지만, 희년이 되면 반드시 원소유자에게 되돌려져야 했다. 이때 중요한 기준은 ‘기여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 원래 누구의 것이었는가 하는 은혜의 기억이었다. 또한 성경은 이삭을 거두며 떨어뜨린 곡식이나 과일, 포도송이를 고아와 나그네를 위해 남기라고 명한다. 여기에도 수혜자의 자격이나 노력은 고려되지 않는다. 나눔은 온전히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 같은 성서적 나눔을 회복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실천되는 기부나 자선은 성서적 나눔과 비슷해 보일 수 있으나, 결정적인 차이는 있다. 기부가 수혜자의 조건에 따라 선택되는 행위라면, 성서의 나눔은 수혜자의 자격과는 무관하게 조건 없는 돌봄을 요구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종살이에서 구원받아 하나님께로부터 ‘거저 베푸심’을 받았듯, 그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이웃에게 거저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 성서의 핵심이다. 예수님의 비유인 ‘돌아온 탕자’는 이러한 나눔 정의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탕자는 아무 기여도 하지 않고 집을 떠났고, 허랑방탕한 삶으로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지만, 아버지는 그 아들을 조건 없이 품어주며 잔치를 열었다. 이것이 바로 성서가 말하는 무조건적 나눔의 윤리이며, 인간의 공로와 상관없이 생명을 존중하고 돌보는 하나님의 나눔 정의이다.7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정의는 ‘공정한 분배’만이 아니다.
정의란 배제된 자들, 기여할 수 없었던 자들에게조차 존엄한 삶을 보장해주는 사회의 구조여야 한다. 교회는 세상이 외면한 사람들 편에 서서 창조적 나눔을 실천하고, 사랑의 창조성을 통해 정의의 그릇을 더욱 넓히는 사명을 지닌다. 정의는 사랑 없이 공허하며, 사랑 없는 정의는 결국 도덕적 우월감으로 타락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교회는 기여도 중심의 분배 정의를 넘어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을 기억하며 ‘조건 없는 나눔’의 윤리를 회복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참된 공동체를 세우는 길이자,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이 땅에 구현하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7) Ibid., 57-60.




5. 현대 사회 속에서 나눔은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가?


1)나눔은 단지 재정적 기부가 아니라 시간, 관심, 공간의 나눔까지 포함한다.

나눔은 단지 재정적 기부가 아니라 시간, 관심, 공간의 나눔까지 포함한다. 건강한 나눔을 위해서 우리 한국교회는 무엇을 회복해야 할까. 필자는 ‘쉼’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는 ‘속도’와 ‘성과’를 미덕으로 여기는 성과주의 문화 속에서, 쉼 없이 달리는 것을 정상으로 받아들이는 풍토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문화는 교회에도 깊은 영향을 미쳐, 신앙 공동체조차 성과 중심의 종교 활동, 사역의 효율, 봉사의 경쟁으로 피곤함을 안겨주고 있다. 그 결과 많은 성도들은 교회를 ‘쉬는 곳’이 아니라 ‘일해야 하는 곳’, 혹은 ‘더 지쳐가는 곳’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교회는 사람을 동원하는 조직이 아니라, 존재를 존중하고 회복시키는 공간이 되어야한다. 인간은 단지 일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분의 뜻을 누리기 위해 창조된 존재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지향해야 할 영성은 ‘일중독적 사역’이 아니라, 자유와 회복, 하나님 안에서의 평안이다. 그렇다면 쉼을 회복하기 위해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사역, 목회를 해야할까. 김혜령 교수의 [쉼이 있는 교회]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첫째, 예배 속에서 쉼을 경험해야한다. 예배는 단지 감정의 고양이나 사역의 동기부여가 아니라, 존재의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시간이어야 한다. 둘째, 사역과 봉사 중심의 프로그램을 줄이고, 성도들이 공동체 안에서 존재 그 자체로 존중받는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셋째, 목회자와 리더들이 스스로 먼저 쉼의 모범을 보이며, 과도한 사역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쉼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회복하며, 관계의 억압과 피로 부터 벗어나 새로운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 결국, 쉼은 복음이 실현되는 시간이며,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회복의 순간이다.8


2)'이웃’은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만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이다.

구미역에서 3분 거리, 작은 상점들이 즐비한 금리단길에 김주영 대표가 운영하는 무인 기독교 책방 온유가 있다. 책방 온유는 9평의 작은 서점이다. 작은 책방이지만, 많은 이웃에게 마음을 쓰고 있는 책방이다. 책방 온유의 수익금은 전액 취약계층, 미자립 교회, 기독동아리, 문화 선교, 콘텐츠 개발, 커뮤니티 운영들을 위해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된다. 적자가 나더라도, 적은 금액이라도 사회에 환원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김주영 대표에게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은, 수익금으로 선물 패키지를 만들어 지역 보육원에 방문한 때였다. 그 보육원은 6명씩 한 방을 쓰고 있는데, 방 대표들이 나와서 선물을 받아갈 때 뒷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꼈다.9 책방 온유는 손 내미는 공간이다.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상관없이 환영하고, 그들에게 대화하자고 청한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이야기도 들려주고자 청하는 공간이다. 9평 작은 책방 온유에게 우리가 배울 점은 이웃의 확장이다.


책방 온유의 이야기는 이웃의 정의를 다시 묻게 만든다. 이웃이란 단지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만을 말하지 않는다. 피를 나눈 가족이나, 자주 연락하는 친구들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이웃은 마음을 기울일 수 있는 모든 존재이며, 손이 닿지 않아도 마음이 닿는 사람들이다. 김주영 대표는 책방 온유를 통해 그 ‘마음의 거리’를 좁히고 있다. 그는 수익을 남기기보다는 남은 것을 나누는 일을 택했고, 그 나눔은 익명의 누군가에게 따뜻한 한 줄기의 위로가 되어 흘러간다. 그렇게 책방 온유는 보이지 않는 다리가 되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과 도움을 주고 싶은 이들을 연결하는 작은 통로가 된다. 우리는 때때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너무 쉽게, 혹은 너무 제한적으로 이해하곤 한다.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곧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드리는 일이거나, 친구의 생일을 기억하는 것에 그치기도 한다. 물론 그것도 중요한 사랑의 실천이다. 하지만 이웃은 나의 세계 바깥에 있는 존재들, 내가 관심을 두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사람들까지도 포함한다. 사회의 그늘에 있는 사람들,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아이들, 자립하지 못한 교회 공동체, 대화를 갈망하는 청년들. 그들 모두가 우리의 이웃이다. 그리고 그들을 이웃으로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그들에게 책임이 생긴다. 그 책임은 때때로 손을 내미는 것이고, 때로는 귀를 기울이는 것이며, 때로는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9평의 작은 공간에서 시작된 이 사랑의 실천은,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공간에서 가능하다. 책방 온유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마음의 ‘자세’에서 출발한 이웃 사랑의 모범이다. 이제내 곁의 ‘이웃’은 누구인지. 그리고 나는 지금, 어떤 손을 내밀고 있는지. 우리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8) 김혜령, 「쉼이 있는 교회: 안식과 회복의 영성을 향하여」, 『한국기독교연구』 제69권 (2022): 35-64.

9) 장진경, 「손 내미는 곳, 책방 온:유 - 김주영 대표」, 『복음과 상황』 (2025년 5월호), https://www.gosc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789.




6. 맺는글

오늘날 한국교회와 시민사회는 ‘나눔’을 말하지만, 정작 그 의미와 방향은 자주 모호해지곤 한다. 우리는 때로 ‘기부’와 ‘자선’의 실천을 나눔으로 착각하고, 정의로운 분배만으로 공동체의 윤리가 실현되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진정한 나눔은 단지 소유의 이전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이며 사랑의 표현이다. 마르셀 모스는 선물이 인간 존재의 본질적 구조라는 점을 일깨워 주며, 성서적 나눔은 자격과 조건을 초월하는 은혜의 응답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나눔은 계산과 효율을 넘어서는 초월적 실천이다. 그것은 손해의 위험을 감수하는 결단이며, 내가 가진 것의 일부를 타인을 위해 비우는 용기다. 그런 점에서 나눔은 곧 사랑이며, 사랑은 자격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늘날 교회가 진정으로 회복해야 할 것은 ‘나누는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다. 쉼을 회복하고, 존재를 존중하며, 작은 공간에서 시작되는 따뜻한 손 내밈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이 땅에 구현하는 실천이 될 것이다.


우리는 한국교회와 시민사회에 꾸준히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의 나눔은 사랑으로부터 오는가? 우리 곁의 이웃은 누구이며, 우리는 그에게 어떤 자세로 손을 내밀고 있는가? 이러한 물음 앞에 선 그리스도인의 삶은 더 이상 소비의 삶이 아니라, 나눔의 삶이어야 한다. 그 삶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는 가장 구체적인 방식일 것이다.







참고문헌

-김혜령. 『기독교 시민교양을 위한 나눔 윤리학』. 서울: 잉클링즈, 2022.

-신혜진. 「한국개신교와 능력주의(Meritocracy)의 결합 문제 – 교회세습을 중심으로」. 『기독교사회윤리』 제56집 (2023): 273-313.

-김혜령. 「쉼이 있는 교회: 안식과 회복의 영성을 향하여」. 『한국기독교연구』 제69권 (2022): 35-64.

-김현자.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 『인문논총』, 제68집,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2012, 쪽 495–508.

-장진경, (2025년 5월호). 손 내미는 곳, 책방 온:유 - 김주영 대표. 복음과 상황. https://www.gosc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789

-표성중. "번영신학, 교회 비도덕화 가속시켜 공신력 붕괴." 아이굿뉴스, 2012년 1월 17일. https://www.igood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33562.아이굿뉴스

-뉴스앤조이. “6년간 30억 원 횡령한 재정집사, 교회는 왜 몰랐나.” 뉴스앤조이, 2022년 10월 5일.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4980.뉴스앤조이

-뉴스앤조이. “목사 은퇴 예우금 문제로 쑥대밭 된 교회.” 뉴스앤조이, 2018년 3월 7일.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9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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