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슬픔과 화해하기
늘 잘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늘 나는 잘해왔고. 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스스로 잘할 수 있다는 말을 많이 내뱉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에. 아무것도 모르고 책 출판을 시작할 때. 어떤 장소에서 사람들 앞에 내 이야기를 할 때. 동인천역에서 서대문역까지 학교 통학을 할 때. 자신이 있든 없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잘할 거라 뱉는 순간에 나는 해내야 했고, 해내다 보면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에. 스스로 장담하며 긴장하고 있는 나를 설득하는 것이다. 어떤 모습으로 결과가 나오든 그건 내 최선이었기 때문에 후회할 필요 없다고. 잘 해낼 수 있다고. 이번에도 늘 해내왔던 것처럼. 물론 잘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실패하고 잘하지 못했던 순간도 있다. 너무 많아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내 삶에 발자국으로 남아있다. 청소년 때 짝사랑하던 친구에게도 비슷하게 내 마음을 전달했었다.
"난 자신 있어 너랑 함께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무슨 근거야?"
"나 재밌잖아."
재미는 굉장히 상대적일 텐데, 그때 나는 재미보다는 그 친구를 좋아하고 있다는 마음과 자신감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 같다. 무색하게도 내 마음을 거절당하는 순간도 많았지만 괜찮았다. 나는 늘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짝사랑하는 그녀에게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많은 장담과 자신감으로 확신을 줬다. 아빠가 반대하던 신학대학교를 갈 때. 어떤 공동체에 임원과 회장을 할 때. 전역 후 복학이 아닌 휴학을 하며 책 작업을 시작할 때. 사진을 전문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할 때. 나는 항상 나와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는 이렇게 결정했고, 나는 잘 해낼 거야."
"어떻게 그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해?"
걱정하는 나와 엄마에게 자신 있게 이야기했다.
"내가 선택한 거니깐. 만약, 틀리고 실패해도 내가 고민하고 선택한 거니깐 잘 감당할 수 있을 거야."
자신감의 또 다른 근원지는 나는 언제나 미래의 나를 믿었다. 하지만, 믿는 만큼 미래의 나는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 있게 결정했던 일이 내 생각보다 잘 안 됐을 때. 믿었던 관계가 실패했을 때. 생각보다 너무 어려울 때. 그런 상처받은 날에 나는 내 방에 들어가 미래의 나를 만나 내 상처를 가져가라고 땡깡를 폈고, 착하고 착하기만 한 미래의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상처를 가져갔다. 상처를 가지고 온 나에게 따뜻한 이불과 누울 수 있는 침대를 제공해 줬다. 걱정하지 말라고, 상처는 내가 가져갈 테니 너는 여기서 잠깐 누워서 푹 쉬라고. 미래의 나는 쓰라린 상처를 모아 일기로 남겨두기도 했다. 그 일기는 경험이 있는 위험요소를 피해 갈 수 있는 지도가 되어주기도 했다. 스무 살이 됐을 때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보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눈에 더 많이 들어왔다. 그래서 나 좋다는 그 감정을 믿어보며 사귀기도 했다. 내 자신감을 보여줄 필요가 없었다.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온도를 유지하는 게 더 중요했다. 그래서 그런지, 한동안은 내가 먼저 자신감을 가지며 누구를 좋아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감을 가지지 않아도 잘 해낼 수 있었던 내 모습에 익숙해지니 어느새 잘할 수 있다는 말을 뱉는 게 어색해졌다. 그리고, 나를 먼저 좋아해 준 사람에게 받는 이별은 현재의 나뿐만 아니라 과거 미래의 나도 상처를 받고 어떻게 해내야 하는지 몰랐다. 잘하는 내 모습이 뭐였더라. 언제나 실패해도 괜찮았던 내 모습은 뭐였더라. 거울 앞에 가도 빛춰보이지 않는 내 모습. 의문들은 모이고 모여 깊은 심해가 되어 나와 내 공간을 침범해 내 모든 모습을 덮어버렸다. 바닷속에 천천히 가라앉는 나는 굳이 헤엄치지 않았다. 다시 올라가려고 하지 않았다. 무서워하고 있는 나에게 또다시 자신 있게 이야기한다.
"잘 실패해 보자. 이건 안 해봤잖아. 이 바다가 얼마나 깊은지 우리는 모르잖아."
"실패에도 '잘'이라는 기준이 있을까?"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너무 다치지만 않으면 괜찮지 않을까? 성공하려고 우리 너무 많이 다쳤잖아. 이번에는 잘 실패하면서 다치지 말아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