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김지윤

by 도서관 옆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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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아니, 이제 어머니란 호칭은 어울리지 않네요. 어차피 피도 섞이지 않은 사이잖아요. 아버지와의 관계도 끝난데다 반역자의 신분으로 이렇게 심판대에 올라왔으니 이제 '어머니'란 호칭은 너무 과분하네요. 참으로 우습네요. 왕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여인의 위치에 있었으면서. 뒷골목에선 가장 강력한 마녀의 자리에 있었으면서. 이제는 이렇게 제 밑에 있네요.


미안하다고요? 제발요. 그런 마음에 없는 말도 하지마세요. 당신한테 제가 무슨 사과를 바라겠나요. 역설적이지만 저는 우리의 관계가 아주 깊고 굳건하다고 생각해요. 지난 몇 년간 서로 죽이고, 피하려고 노력해왔잖아요. 누군가를 이토록 절실하게 생각해 본 적이 또 있던가요? 침대에 누울 때면 혹시나 잠든 사이를 노리지는 않을까, 식사를 할 때면 또 독을 넣지는 않을까.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할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요. 우습지만 정말로 솔직하게 얘기하면 당신에게 고마운 마음도 있어요. 난 당신 덕분에 변했어요. 성숙해졌다고 할까요? 번데기에서 나비가 되었다고 하면 너무 상투적인가요? 영원한 잠의 저주가 실패로 끝난 뒤로 난 많은 것을 배웠어요. 거짓으로 눈물을 흘리는 법도, 목소리로 사람을 홀리는 법도, 누군가를 조정하기 위해선 정말 작은 손동작으로도 가능하다는 것 등등을 말이죠. 덕분에 일곱 난장이들이 축적해 놓은 부를 이용하는 법도, 이웃나라의 왕자님이 가진 권력을 가질 수 있는 방법도 터득했죠. 그거 알아요? 거울을 보지 않아도 지금 제가 가장 닮은 사람은 당신일거에요. 그래서 당신의 거울이 그토록 외쳤나봐요. 둘 중 하나가 사라져야 한다고요.


그러니 사과는 하지 말아요. 당신도 지금 저의 생각을 알고, 저도 당신의 생각을 알고 있잖아요. 우리가 뭐, 말이 필요한 사이인가요? 알고있죠? 당신이 서있는 처형대도 곧 오래 익어가는 포도주 빛깔로 물들거에요. 당신이 옳아요. 왕국 최고의 미녀가 둘일 필요는 없죠. 그럼,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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