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자
아무리 겨울이라지만 이렇게 혹독한 추위라니. 아무래도 사업에 실패한 탕자는, 고향에서도 반기지를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귀환을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으니 거세게 몰아치는 눈도 고마울 따름이다. 어머니를 뵈러 마을 어귀에 찾아왔을 땐 눈발이 잦아든다 생각했으나 막상 어귀에서 집까지 이동한 그 짧은 사이에 오히려 더 거세진 듯 하다.
- 어머니, 아들 왔습니다.
바람을 피해 방 안에 들어왔으나 바람은 소리로 찾아왔다. 닫힌 문은 추위를 막아줄 지 몰라도 소리는 문지방을 넘어 귀를 건드렸다. 어머니는 방 안에 계셨다. TV를 보고 계셨는지 내가 문을 열고서야 아들의 방문을 아셨다.
- 힘드나?
인사보다 대뜸 한 마디를 던지셨다. 아니라고, 그래도 아직 살만 하단 말을 꺼내려고 했다. 사업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에게, 그냥 알고지내는 지인들에게, 고등학교 동창들에게, 한 동안 끊임없이 했던 말이니 쉽게 나와야 하는데. 부모님 앞에서 그러질 못했다. 어머니는 말없이 방 구석에 있던 바구니를 가져와 그 안에 있는 고구마를 건네셨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뭘 또 가져오셨는데, 동치미다.
- 무라.
- 맛있네요. 어머니는 동치미를 어떻게 이렇게 담그셨어요?
- 내가 담궜나. 겨울이라 그러지. 원래 무가 겨울을 버티면 인삼하고도 안 바꾼다 하지 않나.
어머니와 나, 아득하게 멀게 느껴지는 그 공간을 동치미 씹는 소리가 채우고 있다. 겨울 무는 인삼하고도 안 바꾼다는데. 제 풀에 지쳐 물러진 무가 아니라, 겨울을 버틴 무의 이야기다. 난 어쩌면 물러터진 무가 아닐까. 신산해지는 생각들에 아무 말이나 꺼내본다.
- 춥지 않나요? 제가 더 좋은 곳에서 지내도록 신경써야 했는데.
- 괜찮다. 아직 겨울이라 그렇다.
어머니는 모든 것이 괜찮은 분이다. 중학교 때, 동만이랑 개울가에서 장난을 치다 다리를 다쳤을 때도. 스무 살 후반, 희연이 엄마랑 어긋날 뻔 했을 때도, 어머니는 다 괜찮을 거라고 하셨다. 살아보니 그 말대로 정말 다 괜찮았다. 지나보니 그렇게 나쁜 일도 아니었고 못 이길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안 괜찮은 일도 있는 법이다. 어머니의 괜찮다는 주문은 어쩌면 이전까지만 효력이 있는 말이 아닐까.
- 순덕아.
- 예.
- 겨울이라 그렇다. 지나고 나면, 다 괜찮다.
대답 대신 아삭, 하고 씹히는 동치미 소리에 정신이 든다. 서울에서 해남까지, 8시간을 내려 온 여독까지 풀리는 듯 하다. 말을 잇지 못하고 계속 동치미만 씹었다. 어머니는 마음을 표현하는데 말이 필요 없으신 분이다. 어머니와 나 사이, 대화가 흐르지 않아도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창 밖으로 어스름한 달도 목이 마른지 지상에 내려와 국물을 기웃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