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

이가을

by 도서관 옆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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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벌써 며칠째 비가 내린다. 빗발이 세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런 날씨에 우리 집까지 오기 힘들텐데. 골목 끝에 들어와야 찾을 수 있는 외진 집 위치 때문에 선생님이 걱정됐다. 시계를 보니 3시까지 5분도 안 남았다. 선생님은 항상 그렇듯 정각에 딱 맞춰 도착할 거다. 거울을 보면서 삐져나온 것이 없나 눈썹을 정리했다.

- 너 숙제는 다 해놓고 그러는 거니?

뒤를 돌아보니 문 밖에서 언니가 날 보고 있다.

- 남이사 신경꺼.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나왔다. 괜한 모습을 들킨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언니는 아무것도 모른다. 선생님과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처음 과외를 받을 땐 무턱대고 반항심이 있었는데 두 달 사이에 그런 마음은 눈 녹 듯 사라졌다. 촌스럽지만 귀여운 면도 있고, 고지식하지만 그만큼 믿을 수 있다. 겨우 두 달인데, 그 동안 선생님과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나저나 언니는 어딜 나가려는 걸까? 집에서 웬 노란 원피스람.


2.

- 숙제 꼭 해오고. 알겠지?

- 알았어요. 쌤, 안녕히 가세요.

선생님이 가고 나니 집이 휑하다. 허전함에 느낌만 그런 줄 알았는데 언니도 그 사이 집을 나갔는지 정말 집에 아무도 없다. 방에 불을 끄고 거실에 나와 TV를 켰다. 수업을 하는 동안 비는 그쳤지만 바람이 거세다. 언니는 집에 있으면서 베란다 창 좀 닫아두지. 툴툴거리면서 베란다로 나가니 창 밖으로 선생님의 모습이 보였다. 아파트 8층에서 봐도 오늘 입고 온 회색 데님 셔츠가 눈에 띄었다. 나간지 좀 된 것 같은데 아직도 아파트 안 이시네. 반가운 마음에 소리를 내볼까 하다가 멈췄다. 선생님의 곁으로 곧 누군가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잘못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선생님은 노란 원피스를 입은 사람의 손을 잡고 아파트 밖으로 나갔다.


3.

열세 살, 소녀의 아침이 무겁다. 아릿한 아픔에 뒤척이다 깬 하얀 이부자리가 와락 꽃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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