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밤

황가영

by 도서관 옆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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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저녁이면 여름도 기세가 한풀 꺾인다.

찌뿌둥한 몸을 풀겸 집 앞에 흐르는 중랑천을 따라 걷는다.

낮에 비가 와서인지 풀마다 이슬이 어린 듯 찬 기운이 돈다.

비가 온 후엔 이전보다 짙은 풀내음을 맡을 수 있다.

빗방울이 계속 거칠게 내리친 탓에 그 얌전하던 녹색 식물들이 성을 내는 느낌이다.

그래서 비 온 직후에 중랑천은 처음 향수란 걸 써본 소년처럼 향이 코끝을 찌른다.


"아니었나?"


왼편으로 잠깐 스쳐간 여자의 미소와 마주치는 순간, 그 사람의 그림자를 느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돌려 방금 지나간 회색 옷을 찾았다.

450km는 떨어져 있는 사람이니 그럴리가 없는 걸 알지만

시선은 속절없이 그 사람의 그림자를 찾아 낯선 이를 훑었다.

다시 걸음을 옮기니 잠이 없는 풀벌레 울음소리가 날 비웃는 듯 하다.

힘이 빠져서 덜 익은 푸른 사과나무 아래 앉았다.


분명 그 사람의 얼굴, 표정, 웃음이었다.

지난 봄, 십 분 정도 걸으면 바다가 보이던 카페에서 만났던 사람이다.

그 사람을 떠올리면 항상 물기 가득한 향내가 함께 느껴진다.

바다 내음이 물씬 풍기던 그 곳에서 노란색 열대 과일 주스를 먹고 있던 그 사람.

비 온 직후, 야성마저 느껴지는 비릿한 풀내음에 그 사람을 착각했나 보다.


기상청은 방금 내린 비가 올 여름 마지막 장마비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을 떠올리는 이 향기도 마지막일거다.

장마도 끝난 여름인데 풀내음엔 봄이 묻어있다.

봄과 여름 사이 그 어딘가로 어스름한 달빛이 흐른다.

그 사람을 보내기, 완벽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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