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영화 추천 BEST 10
본 게시글은 2021년 연말에 게시한 '2021 올해의 영화 BEST 10'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된 시작점이었던 <해피 아워>는 하마구치 류스케가 비로소 하마구치 류스케가 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아마추어적인 연기와 그 안에 담긴 신비한 일상성을 통해 인물들의 속내와 변화를 들추어낸다. 하마구치는 네 주인공들의 드라마를 따라가지만 해당 서사에 잠재한 변곡점을 찾아내는 데 별로 관심이 없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그들이 각자의 '진심'을 발화하는 순간을 포착하는 데 있다. 카메라는 그 순간을 위해 인물과 일정한 거리를 두며 정말이지 충분히 기다린다. 여기에 감정의 클로즈업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곡진한 기다림의 과정만이 존재한다. 가령, 네 주인공이 커뮤니케이션 워크샵을 마치고 뒷풀이를 가질 때, 카메라는 이혼에 관한 진실과 그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는 인물들의 말을 경청하는 청자의 위치에만 머문다. 인물에게 클로즈업이 들어갈 때에는 현 대화의 흐름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모종의 감정을 숨기고 있음과 그것을 간파해내는 인물의 전지적 면모를 암시할 때뿐이다. 그렇게 영화는 네 주인공들이 자신의 진심을 직접 발화하는 순간에 이를 때까지 지속된다. 5시간 17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은 인간이 자기 심연의 진실을 발견하고 그것을 발화하는 일이 얼마나 지난하고 어려운 일인지 실감토록 한다.
영화의 모든 장면이 균질하게 뛰어나진 않지만 어떤 장면은 하나의 단편 영화로 따로 떼어내도 될 만큼 탁월하다. 커뮤니케이션 워크샵과 그 뒷풀이, 낭독회와 그 뒷풀이, 사진을 찍어준 여행객과의 대화를 담은 버스 장면은 <해피 아워>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일 것이다. 특히 커뮤니케이션 워크샵 장면은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의 대전제처럼 기능한다. 요점은 인생이란 중심을 탐색하고, 중심이 사라지고, 중심이 무너지는 과정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삶의 중심이란 나와 타자, 나와 세계의 균형점을 찾는 것인데, 어느 한쪽에 약간의 균열만 생겨도 중심은 무너지게 된다. 그런 점에서 현명한 인생이란 커뮤니케이션보다 커넥션에 더 가깝다. 양방향의 교류보다 '무언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자체. 상대에게서 그 감각을 느낄 수 없다면 그것은 이미 무너진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해피 아워>의 위대함은 관객으로 하여금 이러한 감각을 자각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소울>은 2021년 개봉한 영화들 가운데 유일하게 관람 중 눈물을 흘렸던 작품이다. 일상의 소중함을 역설하는 영화들은 이미 숱하게 봐왔고 그중 상당수는 픽사의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울>에는 다른 영화에 없는 특별한 울림이 내재되어 있는 것 같다. 내가 흘린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분명한 건 절절한 멜로나 안타까운 사연의 휴먼 드라마를 보고 나서 흘리는 닭똥 같은 눈물은 아니었다. 그것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흘러내린, 처음 겪어보는 유형의 눈물이었다.
이 눈물은 내가 알게 모르게 미래의 암울한 비전과 현실의 남루함에 지쳐 있으며, 사회적 억압과 개인적 트라우마에 여전히 잠식되어 있음을 상기시켰다. 영화를 보면서 작품의 미학적 선택과 태도를 분석하고 영화사적 맥락을 되짚어보는 비평적 업무도 중요할 테지만 가끔은 그러한 작업을 무화시키는 작품을 만나게 된다. 내게 <소울>이 그런 작품이었다. 내 삶을 환기하고 되돌아보느라 영화의 세부는 거의 보지 못했다. 영화적 성취를 논할 때, 관객의 삶을 통째로 환기시키고 되돌아보게 만드는 것만큼 위대한 것이 있을까. 픽사 애니메이션 BEST 3로 뽑았던 <월-E>, <업>, <토이 스토리3> 중에서 <토이 스토리3>는 안타깝게도 <소울>에게 그 자리를 양도하게 됐다.
<파워 오브 도그>는 모순적인 남성성의 세계에 정박한 자와 양 세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자 사이의 흥미로운 심리 스릴러인 동시에 어머니를 지키기 위한 지극한 효도극이면서 몸의 에로티시즘으로 재구현한 탁월한 서부극이다. 제인 캠피온은 문명과 야만, 그리고 둘 사이의 접점과 바깥의 영역을 훌륭하게 도식화하면서 이를 남성성과 여성성의 대립항과 겹쳐놓으며 다양한 층위로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서로의 영역에서 절대 교류할 수 없다고 믿는 필(베네딕트 컴버배치)과 로즈(커스틴 던스트)의 치열한 사투는 그들의 최상급 연기로 구현된다. 마침내 야만이 무너지고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 갈 인물은 동성애자로 묘사되는 어린 효자 소년이다. 남성성과 여성성, 문명과 야만의 세계를 모두 유랑하며 필요에 따라 목적과 방법을 선택할 수 있는 자에게 새로운 서부극을 쓸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제인 캠피온은 여성 촬영감독 아리 웨그너와 협업하여 뉴질랜드 사우스 아일랜드의 풍광을 (영화 제목처럼) 사납고 호기롭게 담아냈다. 산세의 거친 기운과, 느리고 길지만 프레임을 가득 채운 듯한 쇼트의 구성은 관객을 강하게 사로잡는다. 여기에 <팬텀 스레드>, <케빈에 대하여>, <너는 여기에 없었다> 등에서 탁월한 역량을 뽐냈던 음악 감독(이자 '라디오 헤드'의 기타리스트) 조니 그린우드가 첼로를 벤조처럼 연주하며 영화에 독특한 생기를 불어넣는다.
제인 캠피온은 <브라이트 스타> 이후 12년 만에 귀환하여 걸작을 찍었다. <파워 오브 도그>는 네오 웨스턴 시대를 대표할 만한 작품으로 전혀 부족함이 없다.
<퍼스트 카우>는 소박한 표면으로 미국의 역사를 다시 쓰려는 역설적인 야망을 품은 작품이다. 카이에 뒤 시네마 선정 2021 올해의 영화 BEST 1에 뽑혔고 국내 영화 주간지 씨네21의 올해의 영화 순위에서도 당당히 1위에 올랐다. 영화는 1820년대 서부 개척 시대 초기를 배경으로 삼는데,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서부극의 형상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켈리 라이카트는 황량한 스펙타클, 금이나 돈을 놓고 펼치는 목숨을 건 혈투, 백인과 인디언 사이의 갈등 같은 서부극의 컨벤션을 거부한 채 오히려 1.37:1의 '소박한' 화면비로 스펙타클을 지우고, 두 주인공 유대인(쿠키)과 중국인(킹 루)의 꽉 찬 친밀감을 프레임에 우겨넣음으로써 탐욕의 자리를 우정의 가치로 전복시켜 버린다.
쿠키와 킹 루는 영화에서 총 세 번 조우하는데, 그때마다 그들이 머무는 거처가 달라진다. 처음엔 쿠키가, 두 번째엔 킹 루가 각각 자신의 거처를 공유해주고 마지막 조우에 이르면 둘은 각자의 사유지가 아닌 자연이라는 거대한 공유지에 함께 잠이 든다. 영화에서 자연은 식량과 거처를 제공하는 공간이면서, 때로 대피소가 되기도 하고, 때로 탐욕의 본능을 벌하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여타의 서부극에 비하면 너무 소박하지만) 젖소의 우유를 절도하고 조금씩 그 양을 늘려가는 식으로 탐욕을 부리던 두 인물이 나란히 자연의 품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건 그들과 그들의 우정에 내리는 자연의 존엄한 형벌처럼 보인다. 켈리 라이카트는 백인들만의 역사가 아니라 다양한 소수 인종들의 수정된 역사로서 서부극을 고쳐 쓰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마냥 찬양하거나 치켜세우지 않는다.
<퍼스트 카우>는 시종일관 느린 호흡으로 일관하지만 종국에 묵직한 감동을 선사한다. 우열을 가릴 생각은 없지만 나는 어떤 감흥을 발생시키는 데 있어 복잡한 플롯과 빠른 편집으로 무장한 영화보다 단순한 서사와 느린 편집으로 전개되는 영화가 더 많은 난관에 부딪힌다고 생각한다. 범상치 않은 무언가(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가 첨가되지 않는 한 후자의 영화들은 그저 공허하고 지루해질 뿐이다. 그런 점에서 켈리 라이카트를 비롯하여 리산드로 알론소, 페드로 코스타와 같은 슬로 시네마 거장들은 내게 미지의 마법사들이다. 그들의 비밀을 파헤치는 일은 현재 내 역량으론 불가능하지만 언젠가 그 독파의 꿈이 실현되는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자마>에 처음 관심이 생겼던 것은 2010-2020 BEST 영화를 다룬 씨네21 특집호를 접하고 난 다음이었다. 몇몇 국내 평론가를 포함하여 다수의 해외 평론가가 2010-2020 BEST 목록에 <자마>를 포함시켰으며, 해외에서 개봉할 당시 영국의 <사이트 앤 사운드>는 그 해 BEST 영화 5위에 랭크시켰고, 뉴욕의 <필름 코멘트>는 그 해 최고의 영화 1위로 선정하였다. 루크레시아 마르텔은 그야말로 남미 영화의 최전선에 있는 감독으로 손꼽혔다.
보통의 감독은 표면적인 시각 정보와 플롯이 전부인 영화를 만들지만 뛰어난 감독은 한 번도 표면화되지 않음에도 분명 영화에 내재되어 있는 유령과도 같은 무엇을 창조해낸다. 대개 그것은 어떤 감각의 형태로 스며들어 있는데 <자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마>의 느리고 긴 호흡, 그리고 프레임을 감싸는 권태와 침묵, 피폐해져 가는 신체의 형상은 문명의 탈을 쓴 제국주의의 야만적 행태에 저항하는 지난함과 숭고함의 감각을 동시에 일깨운다. 루크레시아 마르텔은 이 무겁고 지루한 과정을 통해 탈식민주의적 새로운 역사 인식을 설파함으로써 제국주의의 편파적 해석과 논리를 타파해 나간다. 영화의 공간이 환각과 몽환으로 점철된,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미지의 공간으로 설정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작품을 관류하는 이 유령과도 같은 감각을 생성해 내는 건 사실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루크레시아 마르텔은 기어이 이를 성공해내고 만다. <자마>는 올해 본 어떤 작품보다도 실험적이고 지적인 영화다.
<그린 나이트>는 비천한 기사가 부패한 속세적 욕망과 부도덕함으로 물든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참회극이면서, 명예롭고 용감한 기사로 거듭나기 위해 본인의 전설을 직접 써내려가는 시네마적 모험극이기도 하다. 또한 나약한 인간과 재생의 자연 사이의 투쟁극으로 볼 수도 있다. 켜켜이 쌓아올린 상징적 지층의 구조와 장엄함과 기이함이 섞인 초현실적 공간, 다양한 색감을 위시한 탁월한 미장센 등 <그린 나이트>는 데이빗 로워리가 얼마나 뛰어난 예술가인지 증명하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그린 나이트>에서 내가 완전히 압도되었던 것은 영화의 카메라가 마치 시네마의 시점 쇼트처럼 운용되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가웨인이 그의 여자 친구 에셀의 물벼락 세례에 잠에서 깨어나던 도입부에서 카메라는 흡사 <이창>의 오프닝과 유사하게 움직인다. 가축들과 그 너머의 사람들을 고정된 채 잡는 듯 보였던 카메라는 천천히 뒤로 이동하며 마치 누군가의 시점 쇼트인 듯 착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그것은 그 누구의 시점 쇼트도 아니었다.
주지하다시피, <그린 나이트>는 중세 서사시 <가웨인 경과 녹색 기사>를 원전으로 하여 각색한 작품이다. 고전 작품의 각색에는 언제나 그것의 현대화라는 난제가 기다리고 있다. 더군다나 <그린 나이트>는 그것의 텍스트 형태가 아니라 이미지와 운동의 형태로 탈바꿈되어야 했다. 고전적인 서사시를 현대 영화로 탈바꿈시켜야 하는 이 난제에 대한 고민의 산물로서 데이빗 로워리는 시네마의 시점 쇼트를 고안해 낸 것으로 보인다(위의 쇼트에서 카메라가 뒤로 빠지면 스크린 모양의 네모난 사각 창틀이 드러나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러니까 <그린 나이트>의 도입부는 현대판 <가웨인 경과 녹색 기사>를 영화의 형식으로 다시 창조하고 구조화하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그렇다면 가웨인이 소년 강도들에게 포박되었을 때, 카메라를 시계 방향으로 360도 회전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감각하게 하고 미래로 시제를 바꾼 다음, 다시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면서 현재로 되돌아오는 경이적인 쇼트는 시네마가 텍스트에 내린 형식적 축복이다. <그린 나이트>는 무엇보다 시네마적 감각이 무엇인지 사유하게 하고 그것을 경험하게 해준다는 측면에서 탁월하다.
최근 국내외를 막론하고 시네필들에게 가장 각광받는 감독은 단연 하마구치 류스케다. 불과 몇 년 전 일본의 떠오르는 신성으로 평가받던 그는 어느 틈에 벌써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해피 아워>를 시작으로 <아사코>를 통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하마구치는 <스파이의 아내>의 각본을 쓰고 <드라이브 마이 카>, <우연과 상상>을 연출하며 마침내 전 세계 시네필들을 열광시켰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하마구치 자신의 연출법을 고스란히 소개하는 작품으로 무엇보다 그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인 배우의 연기를 끌어내는 도연의 방식이 구체적으로 진술되어 있다. 즉흥 연기법의 대가로 불리는 존 카사베츠의 영향을 받은 하마구치는 전문 배우들을 데리고 감정을 완전히 배제한 채 대본을 숙지하게 만든 다음 현장에서 처음으로 감정을 실어 연기하게 만든다. 서로의 감정을 처음 직면하게 된 배우들은 그 즉물적인 표정과 제스처에 즉흥적으로 반응하면서 더욱 진실된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데, 하마구치는 이 순간에 발현되는 '무언가'가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다고 믿는다. 영화를 보다 보면, 어떤 배우의 연기는 아마추어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는 퍼포먼스의 성공은 그것의 실패로부터 나온다는 명제에 입각하여 하마구치가 정교하게 연출한 덕택이다. 전문 배우가 아마추어적으로 보일 때 퍼포먼스는 진정 성취될 수 있으며, 그 안에 어떤 신비한 마법의 힘이 들어있다는 믿음. 하마구치는 이러한 태도로 영화를 찍어 나갔다. <드라이브 마이 카>가 신비로운 건 배우들의 연기 속에 스민 '무언가' 때문일 것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종국에 상처 받은 자들을 위무하는 영화다. 슬픈 내면의 상태를 줄곧 외면하며 살던 한 남자는 자기 감정을 처음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되면서 위안을 얻는다. 위로받고 싶은 사람과 위로해주려는 사람의 '진심'만큼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모든 인간에게 통한다는 믿음. 이 영화엔 '인간'과 '진심'에 대한 숭고한 믿음이 있으며, 그간 느껴보지 못한 참으로 신비하고 아름다운 위무의 순간이 담겨져 있다.
국내에서 올해 가장 주목받은 감독 중에 한 명은 크리스티안 펫촐트일 것이다.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크리스티안 펫촐트의 작품들은 <트랜짓>과 <운디네>의 흥행 성공으로 시네필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 줄줄이 역수입되었다. 9월 남짓의 시기에는 다수의 극장에서 크리스티안 펫촐트 기획전이 열리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전부 고르게 탁월하지만 그 중에서도 최고작은 <피닉스>다. <피닉스>는 처연한 멜로드라마이면서 탁월한 역사 인식을 지닌 작품이다. 크리스티안 펫촐트는 홀로코스트의 참혹함을 몸으로 아로새긴 여자와 그녀가 자기 아내임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녀에게 아내 역할을 연기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남자 사이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범죄의 역사를 망각하고 대강 봉합하려는 자(남자)와 끝내 잊을 수 없다고 몸의 증거를 내밀며 항변하는 자(여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역사 드라마와 겹쳐 놓았다.
두 가지 층위로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던 영화는 종국에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올해 최고의 엔딩을 선사하면서 막을 내린다. 영화 전체를 관류하는 비애의 정서, 그리고 이를 내면화하는 니나 호스의 훌륭한 연기, 우아하면서도 서글픈 음악, 아웃 포커스와 암부의 효과를 탁월히 조절한 촬영술, 색감의 상징적 활용, 내밀한 권력 관계를 표상하는 인물 간 시선과 위치의 변화, 폐허가 된 공간에 대한 역사적 내면적 은유에 이르기까지 크리스티안 펫촐트는 모든 영역에서 최고의 기량을 뽐낸다. 아마 <피닉스>는 관객들의 머릿속에서 끝없이 부활하며 토론과 비평의 텍스트로서 계속 소환될 것이다.
나는 레오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를 보고 완전히 넋이 나갔었다. 그야말로 21세기를 대표하는 걸작이었다. 이후, 그의 초기작들을 전부 찾아 보았고, 이내 그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아네트>는 <홀리 모터스> 이후 레오스 카락스가 약 9년 만에 선보인 신작으로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창의적인 뮤지컬 영화다. 단순한 서사에 인공의 마력을 불어넣은 이 작품은 그 기이함에 압도되고, 이면의 감정적 여진에 무너지기에 충분하다. 아담 드라이버는 1인 스탠딩 코미디 연기를 탁월하게 해내며 올해 최고의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홀리 모터스>가 감독 자신의 경험과 자전적 반성을 함유하고 있듯 <아네트> 역시 레오스 카락스의 자전적 성격이 강하다. <아네트>는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은 욕망과 이에 연이어 실패하고 마는 처량한 신세한탄을 가장 우회적인 방식으로, 가장 인위적인 장치를 활용하여 고백하는 레오스 카락스의 자서전이다. 감각적인 촬영과 시각 효과, 테크니컬한 편집, 인형극을 활용한 탁월한 스토리텔링까지 영화를 구성하는 거의 모든 것이 완벽에 가깝다. 자기 심연의 접촉과 그것의 우아한 탄로를 이토록 독특하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휘감을 수 있는 감독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레오스 카락스는 분명 지금 시대의 가장 뛰어난 시네아스트다.
폴 버호벤이 뛰어난 감독이라는 것은 구태여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다만, 그가 거장의 반열에 오른 건 비교적 최근이다. 고국 네덜란드에서부터 할리우드에서 전성기를 구가할 때까지 폴 버호벤은 <아그네스의 피>, <로보캅>, <토탈 리콜>, <원초적 본능>과 같은 훌륭한 영화들을 연이어 만들었다. 하지만 <스타쉽 트루퍼스>와 <할로우 맨>의 실패로 그는 할리우드 생활을 청산하고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고국에서 다시 재기를 노린 폴 버호벤은 <블랙북>을 시작으로 마침내 <엘르>에 이르러 어떤 경지에 올랐다. 현존 최고의 배우인 이자벨 위페르와 협업한 <엘르>는 그간 한 번도 본 적 없는 창의적 걸작이었다. 들끓는 내면과 이를 애써 차갑게 식히고 있는 표면의 간극을 경이적으로 표현한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와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탁월한 스토리텔링, 그리고 폴 버호벤 특유의 사악한 연출까지. <엘르>는 폴 버호벤을 단숨에 거장의 반열에 오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황혼의 나이에 걸작 중의 걸작 <베네데타>를 완성했다. 국내에서의 반응은 생각보다 미온적이지만 <베네데타>는 카이에 뒤 시네마가 선정한 2021년 BEST 10 목록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고 정성일 평론가의 올해 최고작 중 하나로 뽑혔다. '믿음'이라는 키워드를 놓고 시종일관 관객과 심리 게임을 벌이는 이 탁월한 영화는 <엘르>가 그랬던 것처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면서 사악한 연출의 힘을 바탕으로 그야말로 극단까지 몰아붙인다. 때로 지나치게 과격하고 도발적이라는 이유로 폄훼받기도 하는 폴 버호벤이지만 나는 그것이 어디까지나 과장과 오해의 산물이라고 믿는다. 그는 도발적인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발을 영화로 만드는 사람이다. 이 도발이 혁신적인 것은 상식의 바깥, 관습의 바깥에서 전혀 다른 관점을 채택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베네데타>는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지만 수녀와 기독교를 다룬 여타 영화들과는 완전히 궤가 다르다.
때로 혹자는 폴 버호벤이 연출한 섹스 장면을 두고 지나치게 선정적이라고 지적하지만, 그는 이에 웃으며 답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섹스를 할 때 옷을 벗고 한다는 걸 잊지 말아라." 폴 버호벤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로 섹슈얼리티를 꼽는다. 그러곤 왜 그런 장면들을 보여주냐는 질문에 심드렁하게 답한다. "왜 안 보여줘?" <베네데타>는 폴 버호벤의 작가적 스타일과 감독으로서의 역량이 최대로 응축된 텍스트이면서 그가 바라본 기독교와 수녀에 대한 창의적 관점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폴 버호벤은 이미 기독교와 예수를 자기만의 관점으로 재구성한 책 <예수의 역사적 초상>을 집필한 바 있다). 정성일 평론가의 말처럼 "당신이 보기 전에 무얼 상상하건 보다 사악한 장면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