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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스텔로 Mar 22. 2023

'고독한 프로페셔널' 마이클 만 BEST 5

마이클 만 BEST 5


마이클 만은 작가성과 엔터테인먼트의 정교한 결합을 통해 도시의 비정함, 현대인의 고독, 프로페셔널리즘에 관한 탁월한 영화들을 만들어 왔다. 텔레비전 영화에서 두각을 드러내던 그는 극장 영화 데뷔작 <도둑>을 시작으로 점점 제작 규모를 키워 거대 상업 영화 <라스트 모히칸>, <히트> 등의 제작에 이른다.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그는 줄곧 도시의 이면에 잠재한 어두운 욕망과 이를 두고 첨예한 대립 관계에 놓인 갱스터와 형사 간의 내밀한 친연성을 부각시키는 데 공을 들였다. 그의 세계에서 도시의 낮과 밤은 하나의 연속된 시간처럼 이어지고, 아날로그와 디지털 기술은 아무렇지 않게 공존하며, 선과 악은 그 경계의 모호함 속에서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은 모호한 것들로 세계를 창조해 내면서도 변하지 않는 명제를 전제한다. 그것은 '공적 업무와 사적 비전이 충돌할 때 비극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때 사적 비전은 그들에게 불가능한 이상처럼 형상화된다. 그것은 주로 절대 침입되어선 안 되는 영역에 불쑥 끼어들어온 낭만적인 사랑이다. 경찰의 추적을 받는 갱스터의 사랑, 혹은 갱스터에 대한 형사의 사랑. 이 불가능한 사랑에 대한 집착은 그들의 고독을 배가하고 비극을 잉태한다. 만의 세계에서 사랑은 프로페셔널에 필적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하지만 둘의 싸움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운명론적인 세계 안에서 필연적으로 파국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두 세계의 분리는 만이 즐겨 사용한 통유리 창의 표면적인 공간 구분을 통해 시각화된다. 바깥에는 동경과 이상을 상징하는 바다가 너울거리고, 안에는 비루한 총이나 차가운 공허, 음산한 폭력의 공기가 놓여 있다. 자기 세계 너머의 바다를 고독하게 주시하는 인물의 뒷모습은 만의 세계를 단적으로 함축하는 형상이다(만이 즐겨 활용하는 그림 중 하나가 알렉스 콜빌의 <Pacific>이다. 권총과 남자의 뒷모습, 그리고 바다를 각각 전경, 중경, 후경에 배치한 이 그림은 <히트>와 <맨헌터>의 한 장면과 꼭 닮아 있다. 이와 유사한 구도의 쇼트는 <도둑>, <인사이더>, <마이애미 바이스>에서도 발견된다).


알렉스 콜빌 , 1967
<히트>, 닐 맥컬리의 뒷모습1 (권총-남자의 뒷모습-바다)
<히트>, 닐 맥컬리의 뒷모습2 (권총-남자의 뒷모습-바다)
<히트>, 닐 맥컬리의 뒷모습3 (권총-남자의 뒷모습-바다)
<맨헌터>, 윌 그레이엄과 몰리 그레이엄의 뒷모습 (탁자-인물의 뒷모습-바다)
<맨헌터>, 윌 그레이엄과 잭 크로포드 뒷모습 (권총을 든 남자의 뒷모습과 바다)
<도둑>, 프랭크와 조의 뒷모습
<인사이더>, 로웰 버그만과 닥터 제프리 위갠드의 뒷모습
<마이애미 바이스>, 소니와 이사벨라의 뒷모습                                


만은 <히트>, <알리>, <인사이더>, <퍼블릭 에너미>처럼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에 대한 아주 작은 세부 정보까지 검토해 철저히 역사를 고증하는 방식으로 서사를 구축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과장된 색조, 표현주의적이면서 때로 초현실적이기까지 한 촬영, 고전적인 서사 위로 흐르는 일렉트로닉 사운드 등을 자유롭게 구사함으로써 이질적인 요소들의 배합을 탁월하게 주도해왔다. 말하자면 만은 리얼리스트의 눈으로 드라마를 펼치고 스타일리스트의 감각으로 그 풍경을 담는다. 이러한 사실주의와 표현주의의 내밀한 공존은 그를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코시즈와 같은 동시대 갱스터 필름 거장들과 이 세계의 명실상부 최고 대가인 장 피에르 멜빌과 확연히 구분 짓게 만든다.


만은 그가 설계한 인물들처럼 프로페셔널리즘을 완벽히 체화한 완벽주의자다. 그는 간섭이 일상화된 할리우드 내에서도 자신의 비전을 현실화시키는 데 주저하지 않는 흔치 않은 감독이다. 때문에 실수가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암흑가에서 누구보다 투철한 직업 정신을 발휘하는 갱스터와 형사 이미지에 불현듯 만의 이미지가 겹쳐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의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한 집착과 완벽주의적 성향에 입각하여 탄생한 인물들은 그들이 제아무리 불법을 행하는 갱스터에 불과할지라도 그들의 강도와 살인을 숭고한 노동이자 거룩한 의식처럼 받아들이게 만든다.


일각에선 그를 과장된 수사법과 남성 편향적 세계관에 지나치게 매혹되어 있다는 이유로 비판하기도 한다. 물론 타당한 지적이긴 하지만 물량과 테크놀로지로 도배된 특색 없는 할리우드 영화가 판을 치는 형국에 작가 정신을 발휘할 줄 아는 만의 존재는 필름 느와르에 향수를 느끼고 갱스터 필름의 비장미를 사랑하는 영화팬들에겐 누구보다도 소중할 것이다.



5. 퍼블릭 에너미 (Public Enemies, 2009)



1920년대 미국은 금주법의 허점을 노리고 밀주를 일삼은 갱스터들의 무법지대로 변모한 상태였다. 1929년 월가의 대폭락으로 경제 대공황이 닥치면서 금주법 시대는 사실상 끝이 났지만 갱스터들의 활동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 시기 가장 추악한 갱스터는 시카고에서 마피아를 조직한 '알 카포네'였다(그는 옆얼굴에 난 상처로 '스카페이스'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당시 FBI 국장 에드거 후버는 갱스터들을 공공의 적으로 규정하며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당대 어느 인물보다 인기가 높았던 갱스터들은 대중들에게 공공의 적이 아니라 친구로 여겨졌다. <퍼블릭 에너미>는 이 시기의 인물 가운데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했던 갱스터 '존 딜린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카포네가 기업형 범죄를 저지른 것에 반해 딜린저는 단독자로서 움직이는 떠돌이였다는 점에서 만이 딜린저를 주인공으로 채택한 것은 그의 자유로운 영혼이 <퍼블릭 에너미>에서 중심축으로 작동하는 사랑의 낭만적인 특성과 기묘하게 맞닿아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은 줄곧 필름으로 영화를 찍다 <콜래트럴>(2004)에 이르러 디지털 카메라로 기종을 바꾸었다(만은 적은 빛에서도 선예도를 살릴 수 있어 느와르 장르에 애용되었던 소니 사의 바이퍼 HD 카메라를 <콜래트럴>에서 상업 영화 최초로 도입한 다음 <마이애미 바이스>, <퍼블릭 에너미>까지 사용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영화는 관찰의 영화가 아니라 체험의 영화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카메라는 근경과 원경의 거리감에 신경 쓰지 않고 불안정한 앵글로 현장을 생생하게 담는 데 오롯이 주력한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마이애미 바이스>의 화면은 현장 취재 기자가 보내온 뉴스릴 화면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퍼블릭 에너미> 역시 이러한 만의 동적인 변화가 동일하게 적용되는데, 특히 일련의 총격전에서 그 투박함의 정도는 무척 높은 편이다. 이에 대해 만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1933년을 '보기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1933년에 '있기를' 원했다."



4. 맨헌터 (Manhunter, 1986)



<맨헌터>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윌 그레이엄이 연쇄살인범을 처치하는 결말부 장면이다. 이때 화면은 거의 흑백필름에 가깝게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다. 이는 그간 연쇄살인범의 추적을 위해 그에게 정신적 동화 과정을 겪고 있던 윌의 상상 혹은 꿈의 형상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후 권총을 손에 쥔 채 바다를 바라보는 실루엣 쇼트나 가족과의 상봉 이후 바다를 바라보는 그들의 뒷모습을 담은 프리즈 프레임 쇼트는 그것이 현실의 연속된 흐름에서 벗어나 이상이나 꿈의 감각을 담은 초현실적 사진 안에 존재하는 듯한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니 이 일련의 장면들은 이렇게 묻는 것 같다. 윌 그레이엄은 연쇄살인범을 죽인 것인가, 자신의 영혼을 죽인 것인가. 그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로 각인되었던 가족들이 항상 과장된 푸른 색조 안에서 마치 공포 영화의 희생자처럼 묘사되는 것은 이 불길한 결말에 대한 은밀한 전조였는지도 모른다.



3. 인사이더 (The Insider, 1999)



보통의 언론 영화들, 이를테면 <스포트라이트>, <더 포스트>와 같은 작품들이 언론의 탐사 과정과 그에 수반되는 내적 딜레마를 성실히 재현하는 데 그치는 반면 <인사이더>는 언론의 취재 과정 자체를 취재하듯이 보여준다. 카메라는 그들의 행적을 차분히 옮기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들의 동선과 함께 움직이며, 대화 장면에서는 마치 인터뷰 장면을 찍듯 거침없이 접근해 그들의 심리를 조금씩 추출해낸다. 그들의 펜과 입은 만의 다른 범죄 영화의 총기처럼 운용되고, 그들의 대화는 총기 액션 장면의 한복판에 있는 듯한 실감을 자아낸다. 화면을 가득 메운 채 프레임 바깥의 이상향을 노골적으로 응시하거나, 제 4의 벽을 허물면서 관객을 정면으로 쳐다보는 인물의 시선은 커리어 초기 정치 다큐멘터리에 몰두했던 만의 급진적인 면모를 떠올리게 만든다.


믿음과 배신이 메인 테마로 작동하는 언론의 세계는 만이 그동안 다뤄왔던 범죄 세계의 논리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 안에 속한 인물들의 신념은 갱스터나 형사의 그것과 비견될 만큼 비장한 것이다. 제보자를 보호하겠다는 원칙이 무너지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언론계를 떠나는 버그만의 결단은 절대 동료를 배신하지 않겠다는 갱스터의 엄숙한 결의와 다르지 않다. 유일하게 다른 것은 범죄 세계에서 진실이란 부조리하거나 부재한 것으로 치부되는 반면 언론의 세계에서 진실은 비록 밝혀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부유하고 있는 절대적인 개념처럼 여겨진다는 점이다. 다만, 만의 세계는 진실의 유무와 관계없이 언제나 부당한 것들로 가득한 비극적 공간이다. <인사이더>는 담배 회사의 어두운 비리를 밝혀내며 탐사 다큐멘터리가 목표하는 '진실'을 획득하는 데 성공하지만 가족의 평화와 개인의 신념을 지키는 데에는 철저히 실패한다. 말하자면 만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의 유무가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세계의 부조리다. CBS를 떠나는 버그만의 마지막 뒷모습이 단순히 한 언론인의 은퇴가 아니라 영웅적 갱스터의 위엄 있는 퇴장처럼 여겨지는 건 그러한 연유 때문일 것이다.



2. 도둑 (Thief, 1981)



<아스팔트 정글>(1950)로 강탈 영화의 포문을 연 존 휴스턴을 비롯하여 줄스 다신, 장 피에르 멜빌, 자크 베케르와 같은 이 장르의 대가들이 보기에도 <도둑>은 그들 이후 세대에서 나온 가장 흥미로운 강탈 영화 중 하나일 것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강탈'이라는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춰 그것의 폐쇄성과 피로감을 우직하게 추출해내는 동시에 중장비의 무게감과 메탈 간의 마찰이 빚어내는 건조하고도 육중한 스펙타클을 아름답게 전시한다. 만은 인물보다 더 높은 비중으로 화면을 장악하는 중장비와 메탈 안으로 파고드는 또 다른 메탈의 삽입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며 마치 카메라라는 대리자를 통해 강탈 행위에 동조하는 듯한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프랭크가 뚫린 구멍 사이로 못을 넣어 잠금 장치를 깨부수기도 전에 카메라가 예행연습이라도 하듯 먼저 그 좁은 공간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쇼트는 그러한 인상을 더욱 강화시킨다. 흥미로운 것은 (앞선 몇몇 장면을 제외하면) 이러한 강탈 장면의 동조적 감응을 유도하는 데 별다른 카메라 움직임이 동반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니, 오히려 고정된 카메라의 정적인 촬영이 주된 시각적 테마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말하자면 <도둑>의 강탈 장면은 추체험의 감각이 아니라 관찰자의 시점에서 어떻게 강탈 행위에 동조적인 감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만의 독창적 시각 전술의 향연인 것이다.


<도둑>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화면을 내내 물들이고 있는 녹색 색조이다. 비실리 칸딘스키는 초록의 특성에 대해 "종국적으로 두 개(노랑과 파랑)의 대립적인 운동은 서로 무화되고 완전한 부동과 정지 상태가 생겨난다. 여기에서 초록색이 생겨"난다고 하면서 "모든 색 중에 가장 평온한 색"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초록은 문명과 떨어져 있는 공포의 공간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하다. 외계 생명체나 미지의 공간이 주로 초록색으로 채색되는 것은 그런 연유 때문이다. <도둑>에서 프랭크는 문명의 바깥, 도시의 어둠 속에서 활동하는 여유만만한 단독자다. 초록은 이러한 프랭크의 활동 영역을 물들이며 그의 평온함 심리를 강조하는 동시에 그러한 심리와는 별개로 작동하는 도처의 위협과 불안을 은밀히 축조한다. 평온과 불안이 절묘하게 결합되는 화면을 계속 보다 보면 이 모든 것이 꿈과 환상의 무대가 아닌가 싶어지기까지 한다.



1. 히트 (Heat, 1995)



<히트>는 만을 수식하는 거의 모든 요소들이 탁월하게 농축되어 있는 텍스트다. 특히 인물 탐구에 있어 그 정교함은 극에 달한다. 영화에서 범죄 조직의 수장 닐과 강력계 반장 빈센트는 불법과 공익이라는 완전히 상반된 영역에 몸담고 있지만 사적 관계의 불가능성, 그리고 무거운 고독감을 공유한다. 이들의 친연성의 뿌리에는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한 지나친 매몰이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한 그들의 자의식이 단순히 사명감 때문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없다는 무력감에서 기인한다는 점이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이뤄지는 카페 장면에서 닐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잘 하는 걸 할 거야, 판을 벌여야지. 당신도 잘하는 걸 해, 나같은 사람 막는 일." 그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통해 자의식을 획득하고 자기 존재의 가치를 부여한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뿌리를 공유할 뿐 절대 교통할 수 없는 반대편에 가지를 두고 있다.  이 장면에서 만은 두 사람이 카페라는 동일한 공간을 함께 점유하고 있음을 의도적으로 배척한다. 두 사람의 얼굴은 절대 한 화면에 같이 담기지 않으며, 카메라는 갈등이 심화될수록 그들 각자의 얼굴에 더 가까이 밀착함으로써 그들의 관계를 보다 철저히 단절시킨다. 그들의 신체가 오롯이 한 화면에 담기는 영화의 마지막 쇼트-총에 맞고 죽은 닐과 그의 손을 잡고 서 있는 빈센트의 뒷모습조차 빈센트의 얼굴은 잡히지 않고 서로의 시선은 반대를 향해 있다. 만은 <맨헌터>의 첫 장면-일을 그만두고 떠난 FBI 수사관 윌 그레이엄에게 그의 상관 잭 크로포드가 찾아와 다시 일을 제안하는 장면에서 이미 이와 유사한 구도의 쇼트를 사용한 적 있다. 이때 두 쇼트의 결정적인 차이는 닐과 빈센트의 신체가 그들의 맞잡은 손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만은 절대 교통할 수 없는 두 세계의 팽팽한 균형이 끝내 무너졌을 때야 비로소 그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그의 인물들은 언제나 죽음이나 이별과 같은 극단적 사건을 통해 뒤늦게 관계를 회복한다).


한편, 닐과 빈센트의 연결은 그들의 폭발하는 육체성과도 깊이 관련된다. 빈센트는 그의 첫 장면부터 저스틴과 농후하게 섹스를 하며 결코 상위의 자리를 내주지 않고, 닐은 첫 강탈 시퀀스에서 느닷없이 살인을 저지른 웨인그로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고민도 없이 수 발의 총격을 가한다. 웨인그로에 대한 분노를 얼굴에 차갑게 응축하는 그의 면모는 역으로 그 내면에 뜨겁게 달구어진 분노의 크기를 체감하게 만들고 종국에 웨인그로의 얼굴을 탁자로 거칠게 끌어내리는 행위를 통과하면서 야만적인 수컷의 이미지를 형성해낸다. 흥미롭게도 그들의 육체적 폭발력은 한동안 이성의 냉철함에 의해 제어된다. 그러나 뜻밖의 표면적 평안이 그 이면에 잠재한 진동의 격렬함을 가리지는 못한다. 마침내 그 고요를 깨고 시가지에서 광란의 총격전이 벌어질 때 그들의 육체성은 절정에 달한다. 시가지 총격전이 그저 형사와 범죄자 간의 결투가 아니라 마치 전쟁 영화의 목숨을 건 사투처럼 보이는 것은 그들이 내뿜는 마초적 육체성 때문이다. 그들의 기운은 단순한 카리스마 이상의 것이며, 그들의 저돌적인 사격 자세는 적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사납게 돌진하는 짐승의 육체성과 비견된다. 이 세계에 능구렁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으르렁거리는 맹수만이 존재할 뿐이다. 마침내 빈센트의 총격을 맞고 닐이 육체성의 소멸을 받아들일 때, 닐의 죽음보다 빈센트의 씁쓸한 얼굴과 뒷모습이 강조되는 건 맹수들 간의 싸움이 언제나 생존과 죽음의 이분법으로 구분되지 않고 죽음과 죽음에 버금가는 치명상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빈센트는 그의 표현대로라면 형제(brother)와의 대결 끝에 육체를 보존하는 대신 영혼을 잃고 만 것이다. 깊은 내상을 입은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죽은 형제의 손을 잡고 우두커니 서 있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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