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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스텔로 Mar 25. 2023

<정직한 짐승> <막말태양전>, 가와시마 유조의 실내극


<정직한 짐승> <막말태양전>, 가와시마 유조의 실내극


<막말태양전>
<정숙한 짐승>


가와시마 유조는 몇 년 전 그의 대표작 <스자키 파라다이스 적신호>를 보았을 때 처음 만났다. <스자키 파라다이스 적신호>는 정착의 필요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는 사회에 내던져진 관계의 피란민들에 관한 영화였다. 전후, 사회 재건의 흐름 속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인물들의 씁쓸한 심정을 미니멀하게 포착한 가와시마 유조는 분명 탁월한 역량을 지녔음에도 상대적으로 세계에 널리 알려지지 못한 비운의 감독이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가장 존경하는 스승으로 가와시마 유조를 뽑았고, 실제 그의 영화에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풍선>, <막말태양전>의 공동 각본을 맡기도 했다.


가와시마 유조의 장기는 실내극을 누구보다 유려하고 리드미컬하게 다룬다는 점이다. 실내 촬영은 설사 스튜디오에서 이뤄진다 한들 이미 정해진 공간의 한계로 인해 다양한 앵글을 구성하기 어렵고 카메라 움직임이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적 조건 위에 놓여 있다. 거기에 등장인물의 수가 많아지면 동선의 겹침과 인물들의 더블, 복잡한 컨티뉴이티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더미처럼 늘어난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그로 인해 발생하는 배우들의 뻣뻣한 움직임, 그리고 컨티뉴이티에 종속된 기계적 촬영과 편집이다. 때문에 감독은 아주 정교한 블록킹과 적절한 독립 공간의 부여를 통한 배우들의 살아있는 연기의 도출 등 섬세한 작업을 처리해야 한다. <정숙한 짐승>과 <막말태양전>은 그러한 전술의 독창적 성공 사례라 할 수 있다.


<정숙한 짐승>은 전후 고도경제성장의 흐름 속 물질주의에 빠진 일본 국민들의 양태를 당시 대표적인 주거 형태인 '단지'를 활용하여 풀어낸 블랙코미디이고, <막말태양전>은 막부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를 유곽이라는 장소를 통해 유머러스하게 풍자한 (마찬가지로) 블랙코미디이다. 두 작품에서 인물들은 연극 무대에서 애드리브 퍼포먼스를 펼치듯 자유롭게 공간을 누비고, 카메라는 그들의 동선과 표정을 소품과 공간의 지형물의 정밀한 배열을 통해 담아냄으로써 단순한 장면에 그 이상의 의미를 부가한다. <정숙한 짐승>의 오프닝에서 부부는 거실과 안방을 오가며 물건들을 옮기는데, 이때 거실과 안방을 나누는 기둥이 기준점이 되어 마치 두 세계-이때 거실은 사기가 행해지는 장소고, 안방은 이를 숨기는 은신처다-를 넘나드는 듯한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아들에게 회사의 공금을 횡령하도록 주문한 부부가 집으로 항의 차 방문하는 회사 관계자를 의식하여 비싼 물건은 안에 싼 물건은 밖으로 꺼내 동정심을 유발하도록 연출하는 것인데, 이 가족의 조직적이고 치밀한, 동시에 아주 유연하고 자연스러운 움직임은 물질에 대한 뻔뻔하고 이기적인 당시 일본인들의 위선을 유려하게 길어 올린다.


<정숙한 짐승>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인물들이 단지의 계단을 오르고 내리는 환상 장면에서 처음에는 평지처럼 표현되었던 계단이 갈수록 원래 모양대로 위와 아래의 높이 차가 확연히 드러나는 수직적 이미지로 변모한다는 점이다. 이는 사기극에 연루된 자들의 끝을 모르는 졸렬함과 도덕적 몰락의 은유적 형상이면서, 옥상에서 투신하는 사기극 피해자의 비극적 정조를 한층 강화하는 정교한 시각 스타일이다.


그런가 하면 가와시마 유조는 공간 내부뿐 아니라 외부의 변형을 통해 특별한 감흥을 유도하기도 한다. 젊은 두 남매가 음악을 틀고 신나게 춤을 추는 장면에서 유리창 밖의 풍경은 차츰 붉은 빛으로 물들어 간다. 그렇게 그곳은 홍등가의 한 유곽처럼 변모하고, 두 남매의 춤사위는 손님과 매춘부가 맺는 성관계의 은밀한 은유로 비친다. 실제 가와시마 유조는 근친혼에 의한 출생으로 유전적 장애를 갖고 있었고, 이를 평생의 치욕으로 여기며 살았다(근친에 대한 공포는 <여자는 두 번 태어난다>에서 보다 중요하게 내면화된다).


<막말태양전>은 <정숙한 짐승>에 비해 실외 장면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으나 대부분의 시간을 유곽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할애한다는 점에서 실내극의 형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야기는 크게 세 가지 층위-가난뱅이 사기꾼 사베이지의 유곽 생존기, 최고 기생을 두고 펼치는 오소메와 코하루의 피 튀기는 라이벌전, 민족주의 사무라이들의 영국 영사관 방화 작전기로 이뤄져 있다. 여기서 모든 층위의 근간이 되는 인물인 사베이지는 유곽 이곳저곳을 넘나들며 일을 벌였다 무마하고, 소소한 사건들을 해결하며 돈을 벌고, 오소메와 코하루의 사랑을 받으며 둘을 화해시키고, 사무라이들의 작전을 성공적으로 돕는다.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인물들은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다 나가고, 인물에게 다가섰다 반대편으로 멀어지고, 때로 프레임 안에 길게 머물며 각각의 개별된 움직임을 선보임으로써 유곽의 풍경을 현실적으로 재현한다. 가와시마 유조는 이 복잡한 동선을 능숙한 솜씨로 꿰어내고, 깊은 심도로 근경과 원경에 배치된 인물 모두를 하나의 화면 구도로 온전히 붙잡으며 유곽 특유의 번잡한 관계성을 경쾌한 템포로 그린다. 영화의 백미 중 하나는 자신에게 홀린 남자들에게 돈을 뜯어내려 몇 초간의 시간만을 소비하면서 이 방 저 방을 쉴 새 없이 드나드는 오소메의 행적을 리드미컬하게 배열하는 완숙한 촬영과 편집 솜씨다.


<막말태양전>은 위에 언급한 바 있는 1999년 키네마 준보가 실시한 역대 일본 영화 BEST 100에서 <7인의 사무라이>(1위), <부운>(2위), <기아 해협>, <동경 이야기>(공동 3위)에 이어 <라쇼몽>과 함께 공동 5위, 2009년 실시한 일본 영화 올 타임 베스트에서는 <동경 이야기>, <7인의 사무라이>, <부운>에 이어 4위, 그리고 1995년 설문에서는 10위를 차지했다. 동일한 해(1995)에 조사한 역대 일본 영화 감독 BEST 10에서 가와시마 유조는 7위를 기록했다. 상위에 랭크된 여섯 명의 감독들은 그 이름도 찬란한 오즈 야스지로, 구로사와 아키라, 미조구치 겐지, 오시마 나기사, 나루세 미키오, 이치가와 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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