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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스텔로 Mar 14. 2023

<가버나움>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에 대하여


<가버나움>은 가난과 불행의 포르노그래픽적 재현일까?



“좋은 예술가는 시대의 병을 판정하고 치유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병을 누구보다 깊이 앓는 사람이다”(허문영, ‘보이지 않는 영화’, 강, 2014)


자인은 예술가인가. 그렇다. 판단 근거는 영화 속에 있다. 그의 외적 환경, 즉 그가 생계를 위해 여러 일을 전전하던 시리아 난민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요나스, 사하르, 메이소운 등의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 정보를 전혀 알지 못한 채 영화를 관람하였으나 해당 인물들이 실제의 고통을 발산 혹은 절제하고 있다고 느꼈다. 혹자는 자인을 스타성과 카리스마라는 단어로 규정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의 눈빛에서 그것을 뛰어넘는 삶의 깊이를 느꼈다. 그것은 하나의 감정, 하나의 깨달음이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 쉽사리 표현되기 힘든 복잡 미묘한 감정을 의미한다. 자인은 위대한 성인 연기자의 아성을 초라하게 만들 만큼의 큰 병을 앓고 있다. 그 병은 어디서 왔는가. 그 책임은 누구의 것인가. 영화는 끊임없이 책임을 묻는다. 다소 인위적인 연결인 라힐과 자인의 만남도 책임의 문제를 다루기 위함이다. 그런 점에서 <가버나움>은 관객에게 반성을 요구하는 것을 넘어 끊임없이 경고하는 영화다. 감독은 아이를 책임지지 않고 고통 속에 방치하는 당신을 제 2의 자인이 칼로 찌르고 고소해버릴지도 모른다고 경고하기에 망설임이 없다.


영화 속에 책임을 회피하는 대표적 인물은 자인의 부모다. 그들은 가난을 변명 삼아 죄를 부정하려 애쓰지만 능동적인 선택(임신)을 통해 책임의 크기만 키워 놓은 범죄자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가난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으나 끝내 욕심을 잉태했고 아이를 출산했다. 그리고 그것을 자본과 맞바꾸었다. 반면, 라힐은 자인의 부모처럼 욕심을 잉태하였으나 그것을 방치하지 않았다. 그녀는 화장실에서 몰래 모유수유를 해야 하고 지독한 가난이 이어지는 상황에서도 아이를 돈과 교환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자인의 부모는 아들의 고소로 인해 피고인이 되고 라힐은 요나스와 극적으로 조우하며 희망을 얻는다. 감독이 책임을 회피한 자인의 부모에게는 벌을 책임을 다한 라힐에게는 희망을 선물한 셈이다. 이것은 감독이 관객에게 던지는 은유적인 경고이며 이는 자인의 행동 방식과 결부되어 더 강력한 것으로 상향된다. 자인은 자신의 욕망이 조금도 묻어 있지 않은 사하르와 요나스를 목숨처럼 지킨다. 사하르는 혈연이라는 특수 관계가 책임의 이유가 된다고 해도 요나스에 대해선 그럴 만한 이유가 없다. 이때, 자인은 책임을 강요당하는 존재다. 하지만 그는 <자전거 탄 소년>의 사만다처럼 연민과 책임이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우리에게 일러준다. 이는 라힐이 자인에게 교육한 내용이기도 하다. 그녀는 아무런 접점 없는 자인을 연민의 이유 하나로 자기 집에 거두어주었다. 이후에 자인은 오해하여 라힐이 요나스를 버렸다고 생각하지만 그녀에게 받은 가르침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는 본인의 힘이 닿는 데까지 연민의 대상인 요나스 곁을 지킴으로써 숭고한 보호자가 된다. 이를 통해 감독은 자인에게 연민을 느끼지만 스크린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 무력감을 느끼는 관객들에게 베이루트 빈민을 대변하는 자인을 이제 책임지고 보살펴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지 않으면 자인의 부모처럼 피고인이 될지 모른다고 협박하면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자인이 웃으며 신분증 사진을 찍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너무 고맙다. 혹자는 이 엔딩을 두고 “실제의 무게에 비해 너무 쉬운 타협”, “실제의 폭력성을 봉합해버린다”며 비판한다. 하지만 이때의 웃음이 감동적인 건 자인이 여전히 웃을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을 기어이 해야만 하는 숭고함. 이 논란의 엔딩은 지독한 상황의 완전한 극복이나 슬픔의 가벼운 승화가 아니다. 관객은 “자인이 지독한 현실에서 벗어나 이제 행복하게 살겠구나, 다행이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장면은 외려 자인에 대한 연민을 가중시켜 관객에게 보다 더 무거운 책임감을 짊어지게 한다. 이제 관객은 눈앞의 스크린을 꼼짝없이 봐야만 하는 수동적 감상자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사회 운동가로 거듭난다. 그런 점에서 <가버나움>은 지독히 정치적인 영화일 수밖에 없다. 감독은 적어도 자인의 부모보다는 더 우월한 도덕성을 갖고 있지 않냐며 관객을 자극하여 그들로 하여금 극장 밖의 세계에 시선을 돌리도록 강요한다. 이것이 윤리적인 방법인가에 대해선 더 논의가 필요하다. 다만, 이 영화로 인해 세워진 ‘가버나움 재단’에 수많은 사람들이 후원금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은 영화의 미학적 선택이 실제의 비루한 현실을 극복하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증명하는 긍정적 사례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점에서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후일담은 제거됐어야 했다. 자인과 가족들, 요나스를 연기한 트레저, 사하르를 연기한 시드라, 메이소운을 연기한 파라에 대한 후속 정보는 그들이 점점 나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관객을 돌연 안도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관객들은 무거운 책임감에서 다소 자유로워진다. 동시에 영화는 두 시간의 러닝 타임 동안 비극을 감당하며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한 자인의 영웅적 성공담처럼 비춰지게 된다. 그간 끌고 온 감독의 태도와 영화의 목적은 순식간에 흔들리며 방향을 잃어버린다. 후일담은 그저 ‘가버나움’ 재단을 설립했다는 내용에 그쳤어야만 했다.


<가버나움>은 개인적 차원의 영화일까


<가버나움>이 개인적 차원의 영화에 머무르는가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논의되어야 할 문제가 있다. 모든 영화가 개인의 비극을 사회 문제로 확장시켜야 하는가. 그럴 필요가 있는가. 나는 가끔 사회 구조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을 강박적으로 찾으려는 사람들을 보곤 한다. 하지만 대부분 사회 구조에 대한 사유, 세계에 대한 사유가 부재하다는 문제 제기만 할 뿐 왜 영화가 개인의 문제에 머무르면 안 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나는 영화가 개인의 문제에 머물러도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다. 정도는 없다. 사회 문제는 개인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히 드러나기 마련이다. 어떤 면에서 사회는 개인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영화가 한 인물을 조명하는 순간, 관객은 그 인물이 몸담고 있는 사회와 마주하게 된다. 인물이 어떤 이유에서든 사회에 억압받고 있다면 부조리의 측면에서 관객은 해당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를 실제의 참담함과 부조리의 크기를 축소시키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얼핏 보면 맞는 말 같지만 이 말 안에는 풍요 속에서 자신을 지성인이라고 믿는 사람의 그릇된 착각이 담겨 있다. 더불어 이 말 안에는 ‘실제’가 어떠한지 다 알고 있다는 자만적인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다. 과연 그 실제는 무엇인가.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개인의 비극은 때로 세상 모든 사람들의 비극을 합쳐놓은 것보다 더 참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인간은 인식 이전에 감정이 앞서는 존재다. 사회 구조를 조망하지 않아도 개인의 비극적 감정을 명확히 포착하기만 한다면 실제의 참담함과 부조리의 크기는 전혀 축소되지 않는다. 나딘 라바키 감독이 인터뷰에서 “영화가 상황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사람들이 최소한 이야기를 시작하거나 생각하게 도울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밝혔듯 사회 구조에 대한 문제는 영화가 직접 보여주지 않더라도 최대치의 비극을 느끼고 있는 인물에 깊이 동화된 관객들이 극장 밖에서 충분히 공론화하고 사유화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버나움>은 정말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는 영화일까. 영화 초반, 베이루트의 빈민가를 담아내는 거대한 부감 쇼트는 이 영화가 하나의 인물, 하나의 가족, 하나의 공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거대한 빈민 전체의 이야기라고 선포한다. 이에 상응하듯 종반부에 자인은 한 방송국 라디오에 “어른들한테 말하고 싶어요, 애들을 돌보지 않는 부모가 지긋지긋해요”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부모에서 고통 속에 아이들을 방치하는 모든 부모들로 비판 대상을 넓힌다. 더불어 자인은 법정에서 엄마의 아이를 두고 “배 속의 아기도 나처럼 될 거예요.”라고 저주하고 판사에게 “애를 그만 낳게 해주세요.”라고 부탁함으로써 사하르와 요나스를 넘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아이들에게까지 연민의 범위를 확장시킨다. 그는 결코 개인적 아픔으로 사회의 부조리를 봉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의 잘못된 모든 어른들을 강하게 문책하고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데에 이른다. <가버나움>은 무서울 것이 없다는 듯 거대한 비극의 운명을 관객에게 거칠게 들이민다. 그 운명을 공유한 관객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자인이 몸담고 있는 거대한 비극의 세계와 그로 인한 참담한 현상들을 상상하게 된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자인의 부모는 왜 전 세대의 악습을 답습하였을까?”, “라힐은 왜 불법 이주 노동자가 되어야 했을까?” 관객들은 자신이 모르던 세계를 발견하게 됨으로써 세계관의 확장을 이룬다. 이때 세계관의 확장은 단순한 발견에 그치지 않고 거대한 비극의 역사를 해결해주고 싶다는 연민과 응원의 감정으로 가득해진다. 이제 <가버나움>의 세계는 영화 속에 머무르는 허구의 무대가 아니라 해결해야 할 현실의 비극이 되며 그 모순적인 구조와 비극의 양태들에 대한 사유 과정은 자연스런 수순이 된다. 그런 점에서 <가버나움>은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는 어설픈 영화가 아니라 꽤 높은 수준의 혁명성을 발휘하는 영화다.






<가버나움>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에 대하여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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