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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스텔로 Mar 26. 2023

조던 필의 세 영화, <겟 아웃> <어스> <놉>


조던 필의 세 영화, <겟 아웃>, <어스>, <놉>


<겟 아웃>
<어스>
<놉>


조던 필은 미국 사회의 여전한 사회 문제인 인종 문제를 전면화한 <겟 아웃>을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겟 아웃>은 위장된 외관과 달리 그 이면에서 흑인의 정신까지 지배하려는 백인의 추악한 면모를 독창적으로 그린 영화였다. <겟 아웃>이 특별했던 것은 특정 인종에 대한 무시와 비하뿐 아니라 과도한 경배 또한 인종 차별이라는 점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작중 백인들은 흑인의 유전적 우월함(우람한 육체와 뛰어난 신체능력, 탁월한 예술성)을 과하게 찬양하며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애쓴다. 한마디로 흑인은 잘났기 때문에 백인의 제물이 된다. 흑인의 유전적 우월함은 순수한 인종적 특성으로 인식되는 대신 착취의 대상 혹은 흑인의 존재론적 이유를 설명하는 뒤틀린 해명으로 받아들여진다.


<겟 아웃>은 분명 훌륭한 영화지만 이토록 열렬한 찬사(특히 미국 평단의 찬사)를 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인공 크리스가 최면에 빠져 의식의 지하로 추락하는 장면과 가정부 조지나가 울면서 웃는 기괴한 표정을 짓는 장면 등 몇몇 탁월한 장면들이 있지만 영화 전반에 서스펜스가 적절히 배치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유전적 우월함을 경배하는 것도 인종 차별이라는 유별난 구석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인종 차별의 맥락을 다루는 서사 역시 평이하다. 절대악으로 묘사되는 백인 무리와 절대적 피해자로 그려지는 흑인, 그리고 그 사이에서 사건을 해결하는 흑인 경찰 친구. 이분법적으로 나뉜 인물들 사이에 선과 악의 정도 차는 없고 각각의 대결은 편의적이고 기능적이다. 때문에 서사 자체의 흥미보다 그것에 내장되어 있는, 미국 사회의 기저에 흐르는 인종 차별에 대한 정치적 함의가 보다 강하게 부각된다. 말하자면 <겟 아웃>은 작중 세계가 아니라 영화 바깥의 세계에 빚을 지고 있는 영화다. 그러니 이 영화가 <쓰리 빌보드>를 제치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수상하고 미국작가조합이 선정한 21세기 최고의 각본 1위로 뽑힌 것은 우스운 일이다.


조던 필에 대한 의구심은 미국 사회의 계층 문제를 건드린 <어스>에서 더욱 증폭되었다. <어스>는 소외 계층을 돕기 위해 시작된 '핸즈 어크로스 아메리카' 캠페인과 지하 세계의 복제인간을 소재로 미국 사회의 차별과 억압의 구조를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무엇보다 <어스>에서 중요한 것은 그야말로 셀 수 없이 많은 상징들이 영화에 담겨 있다는 점이다. 상징이 영화의 부분으로 활용되는 것은 너무 흔한 일이지만, <어스>는 이 상징들의 해석을 노골적으로 요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어스>의 상징들은 영화에 대한 이해와 무관한 추가적인 장치가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지 않고는 영화 자체를 이해할 수 없는 핵심 요소로 작동한다. 조던 필은 그러한 상징들이 영화의 본질이라는 것을 반복과 클로즈업을 통해 거듭 강조한다. 1111이라는 숫자, 토끼, 맞잡은 손, '스릴러' 프린팅 티셔츠, 가위, 막내아들의 가면, 막내아들의 놀이 장소인 닫힌 방, 복제인간(막내아들)의 4족 보행, 복제인간이 입고 있는 빨간색 의복 등등.


문제는 이 일련의 상징들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와 조응하지 못한 채 거창하고 강박적인 겉치레로 남는다는 점이다. 영화는 소외 계층으로 태어난 이들을 외면하며 살아온 미국 내면의 자성을 다루면서 정작 그러한 귀결에 의문을 남기는 반전을 심어 놓는다. 지상의 애들레이드와 지하의 레드가 뒤바뀐 삶을 살아온 것이다. 영화는 불우한 환경에서 살아 배우지 못하고 극도의 분노에 사로잡힌 복제인간들의 모습과 그들에게 속절없이 당하는 지상의 교육 받은 원본들의 대립을 그린다. 애들레이드는 지상에서 지하로 내려간 뒤 폭력을 휘두르고, 레드는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와 폭력에 대응한다. 그러나 생존에 성공하고 차에 오른 레드가 마지막 장면에서 사악한 미소를 짓는 대목은 그간 그녀가 지상에서 보인, 다른 복제인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온순하고 교양 있는 평소 모습과 대치된다. 이 엔딩을 계기로 앞선 장면들을 돌이켜보면 레드는 애들레이드를 살해할 때나, 친구 키티 타일러의 복제인간을 죽일 때 누구보다 잔혹했었다. 그렇다면 레드는 주어진 환경과 상관없이 내면에 악을 품고 태어난 인물이거나, 지상에서의 오랜 생활로도 어린 시절에 짧게 겪은 지하 세계의 어둠을 온전히 상쇄시킬 수 없는 인물인 것이다. 요컨대 위의 반전과 그에 복무하는 살해 장면들은 영화가 그간 쌓아올린 이른바 '환경론'의 입장을 붕괴시키는 명확한 자충수다. <어스>는 상징의 과시적 표현에 사로잡혀 스스로 커다란 구멍을 뚫는다.


조던 필에 대한 아쉬움은 <놉>에서 얼마간 씻겨 나갔다. 정치적인 함의와 상징적 수사에 천착했던 그간의 작품들과 달리 <놉>은 그러한 전술에서 다소 후퇴한 뒤, 미스터리와 서스펜스, 그리고 호러와 SF적 쾌감에 더 집중한다. 물론 그렇다고 영화에 은유와 풍자가 부재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어스>와 달리 그 수가 현저히 적고, 보다 은밀하며, 훨씬 논리적으로 작동한다.


조던 필은 한 영화에 두 가지 대치되는 입장을 공존시키고 그것들의 공방전을 담는 위험한 도전을 행한다. 그는 UFO로 보였던 괴생명체와 인물들의 대립을 통해 스펙타클(구경거리)이 산출하는 압도적인 매혹을 선사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보고 소비하는 행위를 죄악시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한다(영화에서 인물들은 괴생명체와 눈을 마주치면 안 된다). 그렇게 조던 필은 스펙타클에 대한 장르적 매혹을 경외하면서도 그것에 중독되는 현상을 경계하고 비판한다. 작중 괴생명체와 주인공 OJ와의 관계는 비단 영화와 관객 간의 관계뿐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볼거리와 구경꾼의 관계가 성립되는 모든 관계를 은유한다. 볼거리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매혹을 선사하지만 구경꾼은 그것에 중독되어선 안 된다.


<놉>은 괴생명체뿐 아니라 말을 타고 달리는 OJ의 모습을 또 다른 스펙타클로 전시한다. 이는 명백하게도 서부극의 스펙타클이다. 조던 필은 실제 서부극의 역사에서 승자로 묘사되었던 백인과 스펙타클의 희생양으로 처리되었던 흑인 사이의 관계를 전복시킨다. 그리고 사진가 에드워드 머이브리지가 찍은, 말 타는 흑인 기수의 움직이는 활동사진을 거듭 강조하며 할리우드와 스펙타클의 기원을 흑인의 입장에서 다시 정립하고자 한다. 압도적인 스펙타클을 선보이는 잔혹한 괴생명체가 끝내 OJ의 조련에 굴복하는 종반부 장면은 스펙타클을 통제하는 흑인의 영웅적 면모를 드러낸다(괴생명체는 OJ가 길렀던 말의 이름을 따와 '진 자켓'으로 불린다. 따라서 OJ가 괴생명체를 조련하는 것은 결국 말을 조련하는 것과 같다. 말이 서부극이 자랑하는 스펙타클의 핵심 아이콘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스펙타클의 역사에서, 더 나아가 영화의 역사에서 흑인이 미친 막대한 영향력에 대해 조명하려는 조던 필의 욕망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놉>은 <어스>에 비해 숨은 그림 찾기나 수수께끼 풀이에 매달리지 않아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장르적 매혹으로 가득하다. 이는 단일한 장르 안에서 추출된 것이 아니라 SF, 호러, 스릴러, 미스터리, 서부극 등 다양한 장르의 융합 속에서 도출된 결과다. <놉>에는 SF의 경외감, 호러의 오싹한 풍경, 스릴러와 미스터리의 숨 막히는 긴장감, 서부극의 광활한 액션이 모두 들어 있다. 또한 탁월한 크리쳐물로서 익숙한 듯 낯선 시각 디자인이 인상적으로 담겨 있다(전형적인 UFO 형상을 띤 괴생명체의 괴기한 흡입구, 구형 매연 방지 호스처럼 생긴 소화 기관과 그것들 사이의 좁은 식도로 빨려 올라가는 인간들의 괴이한 풍경, 그리고 종반부 형체를 바꾼 괴생명체의 대형 해파리 같은 흐물거리는 외관과 사각형 모양으로 출렁이는 미역 줄기 형상의 흡입구를 보라. 특히 비가 쏟아지는 날, OJ의 집 지붕에서 괴생명체가 소화를 마치고 남은 찌꺼기들을 배설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다). <놉>은 어느 쪽으로 보아도 기대 이상의 장르적 만족감을 선보이는 영화다. <겟 아웃>만큼 대중적이진 않지만 조금만 마음을 열면 분명 즐거운 관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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