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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스텔로 Mar 29. 2023

<코르사주>, 완전한 자유를 얻는 유일한 방법=죽음


<코르사주>, 완전한 자유를 얻는 유일한 방법=죽음



<코르사주>는 서사적 측면에서 <스펜서>와 유사한 골격을 지녔지만, 완전히 다른 뉘앙스를 풍기는 영화다. 여성의 주체성을 말살하는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전체 서사의 틀은 유사하지만, <코르사주>에는 <스펜서>에 없는 타나토스의 욕망이 꿈틀거린다. 결정적으로 <스펜서>는 인형의 집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희망적 결말로 귀결되지만, <코르사주>는 그곳에서 벗어났음에도 아이러니하게 끝내 죽음으로 종결된다. 왜 엘리자베트 황후는 기어이 자살을  한 것일까.


그녀의 자유분방한 영혼이 인형의 집 안에 가둬지고, 사회적 위치에 따라 요구되는 교양과 품위라는 무거운 억압이 그녀의 어깨를 짓누를 때마다 그녀는 더욱 자유를 갈망한다. 이때 투신은 자유에 대한 그녀의 욕구가 점점 극단으로 치닫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치다. 영화에는 세 번의 투신이 나오는데, 앞선 두 번의 투신은 각각 말과 궁궐에서 행해진다. 전자의 경우 그녀의 말이 대신 죽게 되고, 후자의 경우 큰 부상을 입지만, 운 좋게 목숨은 부지하게 된다. 그녀는 자신이 말 대신 죽었어야 했다며 울부짖고 끝내 죽지 못했다는 사실에 한없이 좌절한다. 그렇게 영화는 자유에 대한 갈망과 죽음에 대한 열망을 비례적으로 축조한다. 말하자면 그녀는 자유로워지기 위해 죽음을 원하고, 그것의 한 형태로서 투신을 선택한다.


그녀는 끝내 황후 자리를 왕의 어린 내연녀에게 양도하고 궁궐을 빠져나온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이 그녀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황후였다는 사실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 그녀는 과거로부터 억압당하는 처지에 놓인다. 애당초 오스트리아의 황후가 된 순간부터 평생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비극적 운명을 떠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때문에 그녀는 지긋지긋한 궁궐에서 탈출했음에도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과감하게 선박에서 뛰어내린다. 세 번째 투신을 통해 그녀는 죽음에 대한 열망을 마침내 현실화하고, 그럼으로써 완전한 자유를 얻는다. 애석하게도 완전한 자유는 죽음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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