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로메르의 영화에 처음 관심이 갔던 것은 <해변의 폴린>을 보고 나서였다. 히치콕의 열렬한 지지자이면서 진중한 분석가였던 그는 히치콕이 중요하게 여겼던 '인물 간의 팽팽한 삼각관계'를 통해 느슨한 서스펜스를 만들었다. <해변의 폴린>은 만남과 이별 속에서 서로 속고 속이고, 감추고 때로 드러내려는 인물들의 모순된 언행을 통해, 자기기만으로 귀결되는 사랑의 마력을 형상화한다.
이후에 만든 <녹색 광선>은 희망을 품으며 사는 사람들에 관한 영화였다. 영화는 행복과 진실을 상징하는 녹색 광선을 보는 것이 점, 타로, 별자리 같은 미신을 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통해 자기 믿음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얻을 수 있다면 그 어떤 삶의 진리보다도 가치 있는 것이라 말한다. 인간은 자기 삶의 방식이 틀리지 않았음을 합리화할 미신 하나쯤 품고 있는 존재들 아닌가.
<녹색 광선>을 보며 커다란 감동을 받았던 것은 그 희망에 대한 진심과 그것의 구체적 발현이 프레임 안에 아름답게 체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사계절 연작 중 두 편인 <봄 이야기>와 <겨울 이야기>는 조금씩 아쉬웠다. 느슨한 서사 속에 은밀히 축조되는 갈등과 방대하게 쏟아지는 철학적인 대사들은 그의 여전한 매력이긴 했지만 결말부에 이르러 등장하는 어떤 기적의 형상들은 그리 아름답지도 뭉클하지도 않았다. 아마 <봄 이야기>와 <겨울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해변의 폴린>과 <녹색 광선>의 사랑스럽고 순수한 주인공에 비해 매력도가 떨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희망에 대한 진심이 어떻게 감각될 수 있느냐의 문제는 결국 관객이 해당 인물을 얼마큼 사랑하느냐에 달려 있으니까.
근래 가장 인상적이었던 로메르의 작품은 '도덕 이야기' 연작의 첫 번째 작품인 <몽소 빵집>이었다. 로메르는 우연한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설정을 독특한 구조 속에 펼쳐놓는다. 남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다가 또 다른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줄곧 기다리던 여자가 나타나자 새로 만나던 여자를 버리고 기존의 여자에게 회귀한다. 그가 기존의 여자에게 돌아가는 이유는 그것이 도덕적인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그저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로메르는 우리가 도덕이라고 자각하며 벌이는 행위들이 실은 올바른 신념이 아니라 자기합리화에 기반을 둔 것임을 꼬집는다. 흥미롭게도 로메르는 이러한 인간의 모순성을 사랑의 설렘과 그것이 자아내는 순수한 표정 속에 녹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