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강탈 영화의 끝판왕은 존 카펜터의 <더 씽>이다. 그리고 후속 주자는 아벨 페라라의 <보디 에일리언>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필립 카우프먼의 <외계의 침입자>도 무척 훌륭하다. 각각 혈청, 촉수, 포자 등을 통해 외계 생명체가 인간의 몸을 강탈하여 새롭게 탄생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시각적으로 압도적인 장르적 즐거움을 선사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몸이 다른 것에 의해 대체된다는 데에서 생기는 끔찍한 불안감을 형성한다. 이때 가정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몸과 영혼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신체강탈 장르 세계에서 인간은 몸을 강탈당하는 순간 영혼도 함께 빼앗기게 된다. 때문에 이 세계에서 생존에 대한 욕구는 더욱 배가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을 보는 관객의 서스펜스 또한 극도로 치솟을 수밖에 없다.
신체강탈 영화가 재밌는 또 다른 이유는 미지의 대상이 인간의 몸을 강탈하는 기괴한 광경을 보는 시각적 즐거움과 그것들이 인간의 일상에 침투했을 때의 지옥도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체강탈 행위는 필히 신체 변형과 훼손의 이미지와 결부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보디호러가 주는 끔찍한 형상은 불가해한 시각적 매혹을 불러일으키고, 이에 더해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지의 것들에 대한 호기심도 증폭시킨다. 때문에 신체강탈 영화에서 인간의 신체가 어떤 형상으로 변형되고 모방되는지는 아주 중요하다. 끔찍해야 함은 물론이고 어떤 상징이나 은유적 형상을 띄고 있는지 또한 그간 본 적 없는 독창적인 형태인지가 영화의 성패를 좌우한다.
기본적으로 신체강탈 영화는 믿음에 관한 얘기다. 신체강탈이 한번 이뤄지면 인간과 외계 생명체가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인간인지 외계 생명체인지 외관으로는 구분할 수 없는 세계에서 그 식별은 오로지 육감과 믿음에 의존해야 한다. 그렇게 믿음과 의심의 매커니즘이 작동함으로써 피할 수 없는 서스펜스 역시 형성된다. 누구를 죽이고 누구를 살려야 하는가. 누구의 편에 서야 하며 누구를 배반해야 하는가. 신체강탈 영화는 단일한 범인을 추적하는 형사물과 달리 몇 명인지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인원의 신분을 밝혀내야 한다는 점에서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스릴러라고 할 수 있다. 이 믿음의 문제는 작중 인물뿐 아니라 그 세계를 바라보는 관객에게 향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과연 어떤 인물을 믿을 것인가. 그 믿음 안에는 다양한 편견과 오해와 왜곡과 일말의 진실 등이 마구 뒤섞여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자기 내면의 번잡한 양태를 지켜보는 일이란 몰랐던 나 자신을 알아가는 소중한 과정이다. 요컨대 신체강탈 영화는 장르적 매혹을 선사하는 것은 물론 관객으로 하여금 자기 내면의 현황을 인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예컨대, <보디 에일리언>은 인간의 믿음에 관한 단순한 이야기였던 <신체강탈자의 침입>에서 경직된 집단주의에 대한 공포와 화학 무기를 둘러싼 환경 문제로까지 지평을 넓혔다. 또한 <외계의 침입자>는 감정과 마음이 없는 상태를 진화된 차원으로 규정하는 외계 생명체들을 통해 인간성에 대한 성찰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의 삶에서 감정이라는 절반의 요체가 사라졌을 때 그 대상을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인간의 신체를 강탈하여 감정 없는 인간이 된 외계 생명체는 온전한 인간인가, 절반의 인간인가. 그것도 아니면 여전히 끔찍한 외계 생명체에 불과한가. 이때 흥미로운 것은 자기감정을 숨긴 사람만이 외계 생명체가 점령한 이 세계에서 정체를 들키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아야 생존할 수 있는 인간 사회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훌륭한 신체강탈 영화는 단순한 장르적 재미에 머물지 않는다. 인간과 세계에 대해 이해하게 만들고, 그에 대한 깊은 성찰과 사유를 유도한다. <신체강탈자의 침입>, <보디 에일리언>, <외계의 침입자>, <더 씽> 모두 그런 점에서 매우 탁월한 작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