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가장 중요한 감독 중 한 명으로 거론되는 사무엘 풀러는 B급 영화와 전쟁 영화를 주로 만들었던 거장이다. 실제 전쟁에 참여하여 훈장까지 받은 적 있는 그는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많은 전쟁 영화를 찍었다. 그 첫 작품인 <철모>는 흥미롭게도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철모>는 기본적으로 감정이 크게 비치지 않는 서늘함과 비정함으로 가득한 영화다. 사무엘 풀러의 스타일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러한 냉정함은 전쟁이라는 뜨거운 소재를 이성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유도한다. 영화는 시종 전쟁 특유의 격렬한 양태에서 이탈해 그 에너지레벨을 낮추는 쪽으로 전개되는데, 특히 안개가 자욱하게 퍼져 있는 초중반의 장면들은 심지어 초현실적인 분위기마저 자아낸다. 이때 적군인 인민군은 화면에 거의 나타나지 않은 채 안개 바깥에서 총알을 갈겨대는 미지의 대상처럼 형상화된다. 이러한 추상성은 대립과 전투에 비중을 두는 보통의 전쟁 영화와 다른 차별점으로, 보이지 않는 위협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인물들의 처절함과 전쟁의 무의미함을 상기시킨다. 후반부로 갈수록 추상성은 안개가 걷히듯 조금씩 사라지고 보다 구체적인 대립 양상이 펼쳐진다. 인민군들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고, 서로를 향한 총격전은 현실적인 사운드와 함께 아주 치열하게 진행된다. 영화의 후반부, 관측소를 두고 펼쳐지는 전투 장면은 많은 인원을 동원하고 포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저예산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참혹한 스펙타클을 탁월하게 보여준다.
영화에서 특히 눈여겨봐야 할 점은 주인공과 무리를 이루는 사람들의 인종이 어린 남한 아이에서부터 흑인과 일본계 미국인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는 점이다. 이는 전쟁이란 전쟁을 치르는 몇몇 나라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범국가적인 죄악이라는 점을 깨닫게 한다. 또한, 주인공 무리가 어딘지 모를 숲길을 배회할 때 간신히 살아남은 동료, 혹은 피해를 당한 민간인과 전사자, 그리고 적군만을 줄곧 발견하도록 짜인 서사는 전쟁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곤 절망밖에 없다는 끔찍한 진실을 길어 올린다. 좋은 전쟁 영화가 모두 그렇듯 <철모> 역시 훌륭한 반전 영화다.